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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후시딘-어 러부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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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후시딘-어 러부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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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르 연극(창작), 연극(풍자), [테마]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테마] 퇴근 후 직장인들, [추가분류] 초연
공연일자 2014-02-21(금) ~ 2014-03-02(일)
공연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공연시간 화수목금 20시 | 토 15시,19시 | 일15시 | 월 쉼
회차정보
공연시간표
회차 공휴일
1회 20:00 20:00 20:00 20:00 15:00 15:00
2회 19:00
3회
4회
5회
관람등급 만 7세 이상
출연자 곽동현, 김효영, 이정호, 이필주, 임정희, 전선우, 정양아, 황미영
티켓가격 전석 25,000원
러닝타임 70분
제작 주최 :그린피그, 주관 : 그린피그,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문의 02-922-0826
홈페이지 http://트위터 : @wearegreenpig
할인정보 아래참조

예매종료

후기 대티가자단 [0]
웹진TTIS [2]
월간한국연극 [0]
기대평 [1]

작품정보 대티기자단 웹진TTIS 기대평

※할인정보안내

-학생할인 / 2014. 2. 7 ~ 3. 2 / 초중고대학생 / 20% 할인(조기예매와 중복X)

-공연예술인티켓 회원할인 / 2014. 2. 7 ~ 3. 2 / 대학로티켓닷컴회원 및 공연예술인 / 20%할인(조기예매와 중복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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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후시딘

젊은 후시딘

최고 관리자 / 2015-11-27 / 조회수 1335

‘더 러부 스토리’에서 ‘어 러부 스토리’로

<젊은 후시딘 – 어 러부 스토리>



오민아


작: 윤미현

연출: 윤한솔

출연: 곽동현, 이필주, 임정희, 김효영, 이정호, 전선우, 정양아, 황미영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일시: 2014.02.21 ~ 2014.03.02



<젊은 후시딘- 어 러부 스토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차세대예술인력육성사업” 연극분야에 윤미현 작가가 선정되며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이 공연은 윤미현 작가와 윤한솔 연출이 함께하는 세 번째 작업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 역시, 윤미현 작가가 삶의 어두운 단면에서 건져 올린 언어들과 윤한솔 연출의 세상을 바라보는 비뚤어진 시선이 만나 기묘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냈다.

무대는 젊은 후시딘의 가족이 사는 닫힌 공간 ‘집’과 모두에게 열린 공간 ‘공원’, 그리고 이 두 공간을 연결하는 길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공간 설정은 닫힌 공간으로부터 열린 공간으로 향하는 가족의 이동을 상징적으로 내포하고 있으며, ‘담길 방이 없어 떠도는 사람들’이라는 작가의 메시지 전달에 효과적이었다. 무대 위 젊은 후시딘의 집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대야, 양동이, 욕조, 변기와 같은 오브제들이 이러한 이미지 구현에 도움이 되었다. 지붕을 뚫고 떨어지는 빗물을 막아보려 노력하지만 결국 그 물에 젖어 퉁퉁 불어버린 가족들의 무기력함이 윤미현 작가가 재현하고자 했던 이 시대의 닫힌 공간 ‘집’을 구현해 내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작에서 발견되는 젊은 후시딘의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의 주된 이미지인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압도적인 양의 물’, ‘지하보도를 연상케 하는 습도’ 등이 무대에서 충분히 재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 공연은 결국 집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집은 권력으로써 존재한다. 젊은 후시딘의 가족에게 월세를 요구하는 소유주, 도도한 여자는 젊은 후시딘 가족의 희노애락을 장악할 만한 영향력을 갖는다. 심지어 70대의 여자친구가 젊은 후시딘을 사로잡은 이유 또한 집이며 집을 향한 가족들의 노골적인 욕망 표출은 여자친구는 젊은 후시딘을 떠나가는 계기가 된다. 결국 집이라는 권력 앞에서 젊음과 청춘마저도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집을 소유한 이 두 여자들은 젊은 후시딘의 가족들에겐 결코 호락호락한 존재가 될 수 없으며 이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집 없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일면이기도 하다.

젊은 후시딘과 그 가족들은 무기력하다.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빼고는 대부분 방바닥에 드러누워 시간을 보낸다. 밑천이 안 드는 무당이나 꽃뱀이 되겠다는 엄마와 이를 평가절하 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마치 집이라는 권력으로부터 양산된 우울증 환자들의 모습과 같다.

시대의 희망을 대변해야 하는 어린 마데카솔과 신신파스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집을 산다는 건 마치 전래동화에 나오는 심청이 인당수에 빠져 심봉사의 눈을 뜨게 했다는 거와 같은 거잖아요.”라는 냉소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들에게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절대로 전복되지 않는 부동의 계급을 획득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마데카솔과 신신파스의 시선은 작가가 경계하는 시대의 시선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신들이 먹고 싶은 밑반찬 하나 사 먹을 수 없고 자신들의 몸을 편히 뉘일 집 하나 없는 젊은 후시딘의 가족들은 모두 성나있다. 배우들의 성난 화술을 접하며 관객은 이들의 비루한 삶에 남겨진 감정이 분노밖에 없다는 걸 눈치 챌 수 있다. 이들이 분노를 해결하는 방법은 가족구성원들이 서로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뿐이다. 이들은 서로 상처받고 또 그 상처는 곧 단단해져 더 큰 상처 앞에서만 반응한다. 분노에 대응할 대상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출은 이 분노에 희극성을 부여한다. 관객들은 이를 만끽하며 분노와 웃음 사이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충분한 훈련이 되지 않은 상태의 화술이 어렴풋이 그 의도만 전달한 채, 그 의도 속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지는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젊은 후시딘과 그 가족 외에도 서민의 삶을 개혁하겠다는 국회의원이 등장한다. 그러나 막상 당선이 된 국회의원과 기득권 세력인 ‘누나’가 결탁하면서 서민들의 삶은 또 다시 지붕을 뚫고 내리는 빗물로 가득 차오른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국회의원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티브이를 통해 계속되는 대통령의 근엄한 주택공약 발표는 젊은 후시딘과 그 가족들이 겪는 불운함 사이의 괴리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실천되고 있지 않은 정부의 주택공약은 마치 이들의 삶과는 무관한 소음처럼 느껴진다.

대학을 나왔음에도 상자 같은 고시원에 살며 끊임없이 시험을 준비해야만 하는 수험생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 다른 절망감을 경험하게 된다. 젊은 후시딘과 그 가족이 처한 상황과는 다르지만 고시생 역시 닫힌 공간인 ‘집’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그러나 고시생이 용기를 내보기 위해 찾아 곳은 젊은 후시딘의 엄마가 차린 점집이었다. 20년 동안 스스로 마주한 현실에도 변변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던 젊은 후시딘의 엄마는 고시생에게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실질적인 충고를 해준다. 이야기를 통한 경험의 공유 과정은 젊은 후시딘과 그의 가족의 ‘집’을 잠시나마 고통을 펼쳐놓고 직시하는 장소로 변모하게 만든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도 구제해주지 못했던 서로의 고통을 나눔으로써 자가 치유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공연에서 ‘집’을 염원했던 모든 등장인물들은 자의가 아닌 타의로 집을 떠나게 된다. 그들이 찾아가는 대안 공간은 열린 공간 ‘공원’이다. 이 공간은 열린 공간이기 때문에 그 어떤 권력도 작용하지 않는 공간이며 권력이 찾아오면 언제든 새로운 열린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비록 이들의 삶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이란 이러한 열린 공간뿐이며, 자신의 영역표시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철새처럼 이동해야만 하는 단촐한 세간 살림을 소유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아마도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적어도 서로에게 분노할 필요는 없다는 일종의 안도감을 안겨주지는 않았을까.

그들은 열린 공간인 ‘공원’을 ‘집’으로 결정하고 이주를 마친 뒤, 동그랗게 둘러 앉아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각을 전환하는 것 밖에는 해결책이 없는 이들의 모습이 아이러니하게도 동시대 관객들의 가슴 한 켠을 시리게 한다.

결국 우리에겐 아무런 현실 대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 말미에 등장하는 허리를 숙인 채 정지한 젊은 후시딘 가족의 모습은 마치 액자 속에 전시된 그림과 같았다. 아마도 작가와 연출은 관객에게 젊은 후시딘 가족을 통해 동시대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그려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바로 이 자화상을 보며 관객은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 공연은 젊은 후시딘과 그 가족을 통해 이 가족의 집을 향한 애착, ‘더 러부 스토리’에서 출발했다. 작품소개에서 또한 “후시딘의 가족과 동네 사람들은 집이 없기 때문에 사랑에 실패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젊은 후시딘과 그 가족의 이야기는 자신이 담길 공간을 찾는 이 시대 대한민국 관객들과 교집합을 이루며 ‘어 러부 스토리’로 그 의미 확장을 시도했던 것이다.

젊은 후시딘

젊은 후시딘

최고 관리자 / 2015-11-27 / 조회수 1436

‘젊은 예술가’를 위하여

:<젊은 후시딘>(윤미현 작, 윤한솔 연출) 


백두산



“네 맛도 내 맛도 없는, 하지만 꽤 글솜씨가 있는 젊은이들의 문예 시평을 읽으면서, 도대체 이것은 무슨 생각으로 쓴 글일까를 생각해 본다. 말하자면, 마른 나무라도 산에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쓰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비평은 시시한 작업이니까, 그 정도의 뻔뻔스러운 생각은 요즘 보통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 꿰뚫어보는 건 좋지 않겠지, 사실은 그냥 즐거워서 쓰는 것이겠지, 단지 순수한 것뿐이겠지. 그것이 순수함이라면, 순수함이란 얼마나 비열한 것일까?” (고바야시 히데오, 「비평에 대하여」)

‘아르코에서 주목하는 젊은 예술가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공연된 <모래의 여자>(구자혜 각색․연출,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2014.2.18-23)와 <젊은 후시딘>(윤미현 작, 윤한솔 연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2014.2.21-3.2)은 각각 작가 겸 연출가 구자혜와 작가 윤미현을 ‘젊은 예술가’로 세운다. ‘젊은 예술가’란 무엇인가? 일본의 문예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가 쓴 위의 인용문은 ‘젊은 비평가’를 겨냥한 비평의 부분이다. 몇 가지의 단어를 고쳐 본다면 그것은 ‘젊은 예술가’에 대한 비판적 견해로 읽혀지기도 한다. ‘젊은 예술가’라는 이름은 사실 어색하다. 예술 앞에는 젊다는 수식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 앞에 붙는 젊음이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 온 햇수만을 다른 사람과 견주어 일컫는 담백한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교활한 수식어는 ‘실험적이다, 패기있다, 재기발랄하다, 순수하다, 촉망받는’ 등의 말과 친구이다. 한편으로 젊음의 의미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지적과 같이 ‘볼품없이 자리를 채우는 마른 나무, 무대를 하찮게 여기는 뻔뻔스러운 생각, 분수도 모르는 순수함’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연극예술이 진정으로 ‘비열한 것은’ 그것이 오해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젊은 예술가’라는 이름은 이제 작품 활동을 시작하는 예술가들에게는 유용한 것임이 틀림없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여, 예술가에게 ‘젊다’는 수식이 주는 최고의 매력은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완성되지 않았으니, 다음 작품을…….’ 또는, ‘더 좋은 작품을 기대한다.’ 평가는 문장 안에서 유예된다. 전혀 예술적이지도, 비평적이지도 않은 이 말은 ‘젊다’는 모순적인 상황에서만 통한다. 더 비열한 것은 예술가들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는 말이 작품에 대한 객관적 비평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젊은 예술가들은 다음 기회를 받을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우리의 열악한 연극 환경에서 다시 젊은 예술가들이 또 ‘좋은 환경’ 아래 공연을 올리는 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제작과 비평의 과정에서 날아오는 날 선 말을 견디거나 다시 되쏘는 예술가의 말은 젊음의 의장(擬裝)을 입는다. ‘비열하게도’ 이러한 몇 번의 왕복을 거친 다음에야 강철은 완성된다.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패기와 시도에 보내는 메마른 박수와 뻔뻔스러운 생각을 깨뜨리겠다는 날 선 말, 둘의 어느 사이에 있는 것 같다. 젊음의 의장을 입은 예술가들의 시도나 의도를 되도록 충실히 읽어내는 것, 그러한 방법으로 빛나는 찰나를 읽어내는 것, 한편으로 그 안에서 ‘젊음’이라는 의장을 걷어 보는 것이 그 과정에서 필요할 듯하다.


<젊은 후시딘> : 담길 수 없는 가족은 화가 난다!

<젊은 후시딘>(윤미현 작, 윤한솔 연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2014.2.21-3.2)은 물 새는 지하 단칸방에 사는 젊은 후시딘과 그 부모가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 정자에서 살기로 한 이야기이다. 간단하게 ‘집에서 쫓겨난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마도 ‘쫓겨난 이야기’에 주목하면 쫓아낸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고 지키려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일 것이다. 작가 윤미현은 이 구도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방점을 ‘집에서’로 놓을 뿐이다.

<젊은 후시딘>은 후시딘 가족의 모든 사건을 집으로 수렴한다. 엄마는 ‘비 안 새게 해 주고 월세 깎아 준다는’ 국회의원에게 속는다. 문을 만드는 목수인 아빠는 아파트 미분양으로 돈을 받지 못한다. 후시딘은 ‘집 있는’ 애인에게 청혼하여 탈출을 꿈꾸지만, 새벽잠이 없고 각종 장을 손수 담그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물게 참한 70대의 후시딘 애인은 청혼을 거절한다. 모든 사고가 집에 묶여 있기에 나올 수 있는 대사가 신선하다. 후시딘 가족의 방을 찾아온 노구(老軀)의 애인이 방문을 박차고 나가자 엄마는 말한다. “역시 집 가진 여자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집 가진 여자들에게 나이는 문제되지 않는다.

집이란 무엇인가? <젊은 후시딘>에서 말하는 집이란, 문과 벽과 창문이 달려 사람을 담아 두는 건물을 말한다. 담긴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움직이지 않아도 될 장소를 찾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용기가 나/담겨있는 것을 보증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담는 집은 그냥 사람이 ‘있어도 되는’ 장소이며 동시에 그 안의 것이 사람이라는 보증이다. “된장도 항아리에 담기고, 개새끼도 개집에 담기는데” 후시딘의 가족은 집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는 증명말소일지도 모르기에, 마지막 지하방을 지키려는 시도로 후시딘 아빠는 단두대를 만들며 말한다. “내가 뭐 좀만한 새끼도 아니고,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좀이라면 옷 속에 담기리라. 그래, 사람의 새끼라도 좀만하지는 않다.

무대는 후시딘 가족의 원룸과 그 옆의 목수 작업실, 위의 정자로 구성되어 있다. 문과 텔레비전, 빗물통과 이불더미, 변기와 옷장 등이 뒤섞인 원룸은 계단 위 길로 연결되어 수직의 공간감과 더불어 오르내리는 불편함까지 무대에 보여준다. 그러나 원작 희곡에 나타나 있는 습한 지하방의 표현을 빗소리와 고인 물로 표현한 것은 그리 창조적이지 않아 보였다. 연출가는 희곡에 없는, 박근혜 대통령의 주택 공약과 보도가 반복 재생되는 텔레비전 오브제를 무대 위에 놓았다. 후시딘의 엄마가 켜고 끄는 텔레비전의 대통령은 무대 밖의 현실을 환기하며 텍스트가 우화적으로 늘어놓은 분노의 방향을 ‘지금-여기’로 데려온다.

분노는 공연 전반의 독특한 리듬과 억양에서 드러난다. 후시딘 가족의 방에서 벌어지는 모든 대사는 화가 난 듯한 크고 빠른 억양으로 표현된다. 이 지하방에 담긴 가족은 화가 나 있다. 화가 나 있기에 평화로운 대사들 역시 화가 나 있다. 내용과 표현의 불일치는 독특한 웃음을 유발한다. 후시딘 아빠 역의 배우 김효영은 ‘집이 없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의 분노를 표현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창조한다. 단두대를 만드는 독백 장면에서 김효영의 연기는 분노와 절망의 두 감정을 표현한다. 후시딘의 엄마 임정희의 연기는 ‘집착이 많은 성격인’ 엄마의 분노보다는 짜증으로, 정리되지 못한 동선과 같이 부산스럽게 표현되었다. 분노한 대사의 빠른 리듬은 연극의 후반부에 방을 빼라는 선고를 듣고 말았을 때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방을 빼라는 말 끝의 정적이 심지어 웃을 시간조차 주지 않은 이 공연의 빠른 리듬 속에서 강조의 효과를 내고 있음은 물론이다. 연출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이러한 장면은 무대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 빠른 리듬 속에서 원작 희곡의 재치있는 여러 대사 역시 지나쳐 버린다는 것이다.

희곡은 노숙인들에게 정자를 집으로 만들어 주는 ‘집 테이크아웃 사업’ 구상을 마지막 장면으로 삼는다. 후시딘의 가족은 지하방을 떠나서 월세도 없고, 볕도 잘 들고, 길목이라 운수(運數)업에도 좋은 공원 정자로 이사하면서 평화로운 억양으로 ‘집 테이크아웃 사업’과 새로운 삶의 어렴풋한 불안을 이야기한다. 희곡은 여기서 끝나지만 연출가는 끝나지 않았다. 배우들의 인사까지 끝난 마당에, 공연 시작에 집을 가출했던 앳된 신신파스와 앳된 마데카솔이 돌아와 누구의 집인지도 모른 채 정자/집을 부순다. 공연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로 시작하는 설운도의 유명한 망모가(望母歌) <잃어버린 30년>을 들려준다. 부모님은 그립지만, 집은 부수어야 한다는 것일까.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떤 곳에 담겨 있는가. 연출가 윤한솔은 ‘집 테이크아웃’ 이라는 세계에 대한 작가적 상상력을 구현하면서도, 텔레비전 오브제와 정자/집이 부서지는 장면을 삽입하여 다시 ‘집’의 문제의식을 ‘지금-여기’의 세계에 머무르게 한다. 앳된 신신파스와 마데카솔의 이야기, 아마도 가출 후 어딘가에서 남의 집을 부수며 살아갔을 지도 모르는 아이들은 결말에 다시 등장한다. 공연에서 이 아이들은 결말을 위한 기능적인 역할만을 수행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컨대 윤한솔의 공연 <젊은 후시딘>이 천착한 곳은 ‘테이크아웃’의 상상력이 아니라 ‘담기는 것’이 불안정한 사회에 대한 분노라는 점, 그렇기에 ‘집 테이크아웃’이 공연의 결론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이는 집에 대한 대안의 사유가 과연 존재하는가, 그것이 이 작품의 진지한 핵심인가 하는 반문이기도 하다. 그 대안이 없다면 희곡의 결말과 달리, 공연에서 ‘담기는 것’의 현실적 분노로 돌아오는 연출가의 결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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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제목 글쓴이 등록일
별점4점 4점 정말 세상모든일이 뜻대로 안되고 화가나는 상황에서 가족이 어떻게든 살아보려 하지만 결국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잘 표현했습니다. 처음엔 왜 저렇게 연기할까? 하지만 나중에는 이해가 되네요. 좋은 공연이었습니다. 이용현 201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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