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2인극 페스티벌 명작을 만나다: <프랭키와 쟈니>, <숨쉬러 나가다>
최고 관리자 / 2012-04-12 / 조회수 5188
제11회
2인극
페스티벌 명작을 만나다:
<프랭키와
쟈니>,
<숨쉬러
나가다>
박연숙
<프랭키와 쟈니>
공연
일시:
2011.11.9-13 설치극장 정미소
연출:
장경욱
출연:
주유랑,
진남수
관람일시:
2011.11.18
<숨쉬러 나가다>
공연
일시:
2011.11.9-13 설치극장 정미소
연출:
이영석
출연:
김승언,
이종무
관람일시:
2011.11.12/ 2011.11.18
제11회 2인극 페스티벌의 타이틀은
‘명작을 만나다’이다.
2000년부터
시작된 2인극 페스티벌이 그 동안
‘프랑스 현대2인극 작품전’,
‘러시아
2인극 작품전’,
‘경계와
소통’,
‘육담과
골계’,
‘창작
2인극’,
등 지역 또는
번역/
창작을 구분하거나
주제적 제약을 두어 진행되었는데,
올 해의
‘명작을 만나다’는 창작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광범위한 타이틀을 내걸었다.
그렇다보니 한국
전통의 재담 연희극에서부터 영화,
소설까지 두루
아우르는 다양한 명작들이 2인극으로 변신하게
되었고,
관극의 포인트는
어떻게 2인의 배우로 명작의 깊이를 담아내느냐에
모아졌다.
‘누군가’에서
‘바로
그 유일한 사람’이
되어가는 실존적 만남:
<프랭키와
쟈니>
장경욱 연출이
‘2인극 페스티벌’에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제4회 핀터 페스티벌’에서 <킬킬킬 Kill!
Kill? Kill!>(2006, 헤롤드 핀터의 <덤 웨이터 Dumb
Waiter>의 내용을 제목을 바꾸어
연출,
까망
소극장)로 두 킬러들의 비루함과 긴장감을 밀도
있게 연출한 바 있어 기대가 생겼다.
<프랭키와
쟈니>(테렌스 맥넬리,
1987)는 애초에
2인극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 각색의 부담이
없는 작품이다.
한 식당에서
요리사와 웨이트리스로 만나 오랜 머뭇거림 끝에 서로에게 다가가고 사랑에 이르는 과정을 하룻밤 사이의 구애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작이
2시간 20분에 가까이 긴 길이지만 이번
페스티벌에서는 1시간 20분으로 줄였다.
1시간 가까운
압축에도 불구하고 텍스트 해석에 충실한 연출 덕에 두 인물의 심리가 원작에 가깝게 잘 전달되었다.
30대 후반의 프랭키(주유랑 분)는 7년 전 애인과 헤어진 후 남자에 대한
불신으로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여성이다.
그녀의 옛 남자는
프랭키의 친구와 바람을 피웠고,
그녀를 잔인하게
학대해 유산시키고 불임으로 만들어 버렸었다.
옛 남자로부터 받은
배신과 폭력으로 프랭키는 의심많고 냉소적이고 메마른 인간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기르던
잉꼬새가 죽었을 때 잘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매정한 주인이었고,
서로 뜨겁게 정사를
나눈 후 남자가 지속적인 사랑을 원하자 어서 나가달라고 매몰차게 구는 차가운 여성이며,
스스로에 대해서는
‘별 볼일 없는 감자’라고 말하는 건조한
인물이다.
40대 후반의
쟈니(진남수 분)는 전처와의 사이에 아이들이 있지만 거듭된
실패로 자신감을 잃어 아이들 만나기조차 두려워하는 초라한 이혼남이다.
그렇지만 옷장에
영어 사전과 셰익스피어 전집을 넣어두고 다니고,
셰익스피어의 글귀를
암송할 정도로 감성적이며,
프랭키에 대한
감정을 끝까지 지켜낼 만큼 열정적이고 진실하다.
이 극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쟈니의 고집 센 성격이다.
프랭키의 사랑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설득하고 갈구하고 달랜다.
반면 프랭키는 다소
복잡한 성격을 보여준다.
처음 뜨거운 정사를
나눌 때는 쟈니를 향해 거침이 없이 나아가다가 정사를 끝낸 후 이내 거리를 두고 냉정해지고,
또 다시 쟈니의
간절한 요구에 반쯤 수긍하는듯하다 또 다시 튀어 나가버린다.
특별한 사건도 없이
공연 시간이 길어진 이유는 쟈니의 구애에 프랭키가 그 만큼 강하게 저항하고 오래 질질 끌고 머뭇거리며 주저하기 때문이다.
토요일 하룻밤의
뜨거운 정사로 시작된 이 작품은 일회적 관계로 끝날 수 있던 프랭키와 쟈니가 과연 쟈니의 바람대로 지속적인 연인이 될 수
있는가이다.
그 둘이 사랑으로
연결되는 고리는 음악과 달빛이다.
극의 시작과 함께
라디오에서 바하의 골덴베르크 변주곡이 흐르고 있었고,
프랭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곡이 멋지고 담백하고 순수하다고 여러 차례 감탄하자,
쟈니는 그 곡을
선물하기 위해 라디오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DJ에게 직접 곡의 이름을
알아낸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얼마나 주저하다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었는지 사연을 전해주며 지금까지 세상에서 들어보지 못한 가장 아름다운 곡을 신청곡으로
청한다.
이들은 달빛 아래서
라디오 DJ를 통해 자신들의 이름과 사연이 전해지는
것을 듣고,
DJ가 선정해 준
드뷔시의 ‘월광’의 선율 속에서 다시 한 번 사랑을 나누기
시작한다.
그러나 일순간
쟈니의 몸에 기력이 빠지며 암전이 되고 1막이 끝난다.
2막의 시작은 다소 긴장이
돈다.
쟈니의 몸이 젊었을
때와 같지 않다는 것에 쟈니는 속상해하고 프랭키는 가벼운 조롱을 섞으며 웨스턴 샌드위치를 만들어 달라고 조른다.
쟈니는 자신의
쇠잔을 DJ
탓으로 돌리며
‘자기 자신만을 위해 연주한
곡’(바그너의 곡이었다)에 대해 불평한다.
그는 셰익스피어를
인용해 “음악이 사랑의 음식일 경우에만 연주해
주오”라고 말하고 프랭키를 위해 샌드위치를
만들어 건넨다.
그 이후로도 둘은
계속 구애와 거절을 반복하다 프랭키가 나가달라는 말을 남기고 욕실로 들어가 버리자 쟈니 역시 주섬주섬 옷을 챙기며 나가려
한다.
이처럼 가망 없는
순간에 다시 한 번 라디오의 반전이 펼쳐진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곡으로 드뷔시의 ‘월광’을 다시 한 번 들려주겠다며
DJ가 프랭키와 쟈니의 이름을 또 한 번
부른다.
“프랭키와 쟈니가 정말 그들의
본명일까요?
저는 실명이면 좋겠습니다.
사정이 없다면 우리가 존재할 필요도
없으니까요......달빛 속에 계실 두 분,
당신들이 누구이든,
어디 있든,
여기 그 곡을 다시 한 번
보내드립니다.”는 멘트가 끝나자 욕실의 문이 열리고 양치질을 하고 있던 프랭키가 밖으로 나와
쟈니에게 새 칫솔로 양치를 하라고 권한다.
달빛 아래서
자신들만을 위한 곡을 방송으로 들으며 다정히 양치질을 하며 막이 내린다.
결말이 다소
급작스럽긴 하다.
그러나 그러한
결말이 이 작품의 흠이 될 수는 없다.
달빛과 음악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인연을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원에 수많은
장미들이 있는 것처럼 지구상에 수백만 명의 프랭키와 쟈니가 있다.
무수한 군중 속에
단지 ‘누군가’로 남아 있는 것은 외롭고
지친다.
그 지독한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 쟈니는 프랭키의 이름을 불러주고 자신의 굳건한 믿음과 사랑을 가슴에 새기며 ‘바로 그 유일한 프랭키와
쟈니’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러한
쟈니의 실존적 선택이 프랭키에게는 쉽지가 않다.
새로 찾아든 한
남자가 불러주는 이름에 답하기에 그녀는 너무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역시 이
작품에서 그녀의 깊은 상처를 달래주게 된 것은 쟈니의 용기 있는 행동 덕분이다.
쟈니가 그녀에게
속삭이는 말들이 그녀를 움직이지 못했지만,
쟈니의 신청으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프랭키와 쟈니를 위한
곡’이 그녀를 움직였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1막과 2막이 다르지 않지만 1막의 프랭키와 쟈니는
‘누군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2막의 그들은 비로소 바로 그 유일한
실존으로 존재하게 되고 ‘프랭키와 쟈니’의 실존적 만남을
이룬다.
이 작품의 최대
난제가 바로 이 장면에 있다.
이 장면을 살리지
못하면 아무런 사건도 없이 두 남녀가 밀고 당기기로 시간을 끌다가 1막과 2막 모두 라디오 DJ의 멘트로 둘의 관계가 반전을 이루는
설정이 되어 버린다.
그 정도로밖에
표현하지 못한다면 이 작품은 대단히 지루하고 시시해진다.
두 배우에게
요구하고 싶은 바는 실존적 만남의 과정을 연기할정도의 연륜과 진실성이다.
쟈니는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수컷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숱한 좌절로부터
헤어 나와 마지막 희망인 프랭키를 놓치지 않겠다는 비장한 의지를 연기해야 한다.
프랭키는 단지 잘
넘어오지 않는 차가운 노처녀가 아니라 깊은 절망으로 길을 잃은 애처로운 인물에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실존을 찾아가는 조심스런 인물로 연기해야
한다.
그러한 연기로
나아갈 때 ‘프랭키와 쟈니’는 무대 위의 그들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서 발견되고 공감되고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 될 것이다.
소시민의
조용한 비극:
<숨
쉬러 나가다>
<숨 쉬러 나가다>(조지 오웰,
1939)는
보험업에 종사하는 조지 볼링이라는 중년 남성의 1인칭 시점의 소설이다.
주인공이 어느 날
문득 낚시하며 행복했던 과거 유년 시절을 회상하게 되고 가족 몰래 20년 만에 혼자 고향을 찾아 나섰다가
아름다웠던 숲과 연못이 산업화에 휩쓸려 파괴된 것을 목격하고 집으로 돌아 와 이전보다 더 무기력하게 살게 된다는 내용이다.
조지
오웰의『쉼 쉬러 나가다』는 1938년 당시를 소설 속의 현재 시점으로 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근이 생활하는 소시민의 찌든 일상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의 징후를 알리는 파시즘의
등장과 히틀러에 의한 전쟁의 위협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순수문학가에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정치이념의 작가로 이동하는 전환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다양한 사건과 배경이 펼쳐지는 장편 소설을 2인극으로 각색한 실험 정신이
놀랍다.
더구나 아무런 무대
장치나 소품 없이 빈 무대에서 단 두 명의 배우만으로 이끌었다는 점이 대단하다.
빈 무대는 배우의
연기를 돋보여 주었고 연출자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두 명의 배우가
모두 주인공 조지 볼링의 관점에서 시대와 상황을 설명하듯 연기하고,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는 주인공이 행하는 역할 놀이로 끌어 온다.
이러한 내레이션
방식은 박근형 연출의 <외투>(2005,
제5회 2인극 페스티벌 러시아
2인극 작품전)에서도 사용되었다.
<외투>와 <숨 쉬러 나가다>
두 작품 모두
소설이 원작인 점을 감안하면 내레이션 방식은 소설이 완전히 희곡화되기 어렵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양한
장르를 연극으로 흡수하면서 문제 삼아야 할 바는 특정 방식의 반복에 있다기보다 작품에 사용된 방식이 극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숨 쉬러 나가다>의 내레이션 방식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 명의 볼링이
매우 단순한 사실을 설명할 때조차 연극적 상상을 충분히 잘 불러일으켰고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를 연기할 때는 더욱 역동적인 리듬으로 연기했고
무엇보다 설명과 연기가 매끄럽게 잘 융합되어 단절의 홈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측면에서
이 작품의 미덕은 동시대적 공감에 있다.
1938년에 살고
있는 조지 볼링이 21세기의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시대 예언에 뛰어난 조지 오웰의 통찰력 덕분일 것이다.
주인공 조지 볼링은
가계 대출금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생계를 위한 업무에
파묻혀 지내고 있고,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지탱하고
있으며,
아이들의 양육비와
교육비를 벌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온전히 포기하고 있다.
그는 우직한
가장이긴 하지만 위엄 있는 가장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중년 남성들의 위상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암울한
이야기를 조지 오웰은 천연덕스럽게 끌고 간다.
“그 생각이 딱
떠오른 건 새 틀니를 하던 날이었다.”는 소설의 첫 문장으로부터 아내의 닦달에
두 손 들며 “젠장할!
셋 중에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는 마지막 문장까지 위트와 웃음이
가득하다.
전쟁에 대한 위협과
지식인 포티어스박사의 무관심은 예리한 풍자로 표현한다.
조지 볼링이
박사에게 히틀러에 대해 묻지만 그는 고전에만 관심 있을 뿐 현실의 히틀러의 존재는 관심없다.
그런 그가
반복적으로 하는 말은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라틴어이다.
이런 위트와
풍자가 원작의 힘이라면 이영석 연출은 에필로그에서 비극성을 추가한다.
두 배우는 조지
볼링의 생애를 다시 한 번 짚어주며 그가 다시는 고향을 찾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로부터
1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그 후로 오랫동안
조지 볼링이 훨씬 더 바빠져서 다시는 낚시를 하지 못했다고 말해준다.
현대를 사는
소시민들이 애써 감추고 싶어 하는 비극을 환기시켜주는 부분이다.
비극이라고 모두
눈물을 짜거나 누군가 비장하게 죽음을 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조지 볼링의
생애가 현대인의 비극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조용히
그리고 자유를 가장한 억압으로 스며든다.
현대의 비극은
운명이나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 동의를 얻어 조용히 행해지는 자기 억압이다.
숨 막히는 일상을
벗어나 숨 한 번 쉬러 계획한 모처럼의 외출이 결과적으로는 더욱 더 깊은 일상에 매이게 한 이 작품의 결론에는 희망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검은 배경 탓에 빈
무대의 어둠은 쓰레기 매립을 위해 파 놓은 연못의 구덩이를 연상시킨다.
그 구덩이
밑바닥에서 숨 쉬러 나갔다가 소심하게 금방 되돌아온 조지 볼링의 인생은 오히려 현대인의 깊은 수면을 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조지 볼링처럼
타인에 의해 이끌려 평생을 살다가는 어두운 구덩이 밑바닥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될 거라는 경고가 각성의 효과를 불러
온다.
한 인물에 대한
애정과 좌절로부터 현실의 문제를 들춰내고 비판하게 하는 과정이 능숙하다.
두 배우의 탁월한
연기와 섬세한 연출 덕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명작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숨 쉬러 나가다>와 <프랭키와 쟈니>는 모두 중년을 위한 연극이라는 점에서
반갑다.
삶의 고단함과
무게로부터 얻어진 이야기라는 점에서,
중년의 감성과
일상을 섬세한 감각으로 되살렸다는 점에서 의미 깊은 작품들이다.
대학로의 연극이
20대를 위한 화려한 볼거리와 신나는 노래
위주의 공연에 머물러서는 지속적인 발전을 보장할 수 없다.
2인극 페스티벌을
통해 저예산의 다양한 수준 높은 작품을 발굴하는 작업이야 말로 한국연극을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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