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거울, 그 이후 <거울 뒤 여자>
최고 관리자 / 2012-07-19 / 조회수 7655
사라진
거울,
그
이후
백소연
공연명
:
<거울 뒤
여자>
원작
:
김영하
극본‧예술감독 :
홍창수
연출
:
김봉건
출연
:
한은비,
김강수
제작
:
극단
창
공연기간
:
2012.05.12-2012.05.28
공연장소
:
설치극장
정美소
추억의
과거
‘모든 견고한 것이
녹아내린’
1990년대.
포스트모던적
선언들이 당시의 문화계를 뒤흔들던 그 변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소설가 김영하가
존재했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데뷔작이었던 <거울에 대한 명상>(1995)을 처음 대했던 짜릿한
충격마저도,
이미 이십여 년 전
추억이 되어 버렸다.
2004년에
개봉했던 영화 <주홍글씨>에서 어두운 자동차 트렁크 안에 갇혀
처절히 얽혀 있던 남녀 주인공의 모습 역시,
그 이듬해 요절한
여배우에 대한 향수만큼이나 아련하게 남겨져 있다.
그러기에 김영하의
원작을 이 시점에 무대 위에서 새삼스레 환기하는 연출의 의도가 무엇일지,
처음부터 뚜렷한
물음표를 안고 공연장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다소
진부해져 버린 1990년대식 주제와,
영화를 통해
만들어진 익숙하고도 분명한 이미지들 사이를,
그것들이 만들어낸
겹겹의 과거를,
어떻게 가로지를 수
있을까.
연극
<거울 뒤 여자>가 2012년의 관객에게 건네려는 그 새로운 이야기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지 사뭇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녀의
사라진 거울
11월 초,
강변에서 재회한
불륜 관계의 두 남녀는 정사를 나누기 위해 버려진 자동차 트렁크 안에 들어가지만 여자의 실수로 그 곳에 갇혀 서서히
죽어간다.
연극은 김영하의
소설 <거울에 대한 명상>의 이러한 기본 플롯을 매우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다.
소설 속의
‘나’처럼,
극중
‘재민’은 아내 ‘성현’과 정부인 ‘가희’
사이에서 그녀들을
적절히 통제한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충족시켜 온 인물로 형상화 된다.
그는 대학
후배였던 가희와의 만남을 즐기면서도 그녀의 소개로 알게 된 성현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도 여전히
가희와의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재민의 시선에서
가희와 성현은 대척점에 놓여 있는 존재들이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거리낌 없이 배설할 수 있는 ‘하수도’와도 같은 가희에 비한다면 성현은 한없이
정갈하며 순결한 여성이자 고귀한 사랑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러한
성현의 이미지는 그녀를 자신의 이상적 자아와 동일시하려는 재민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다.
성현과 가희는
고교 시절부터 동성애적 관계를 맺어 왔으며 성현은 가희와 재민의 관계를 알고 배신감에 일부러 재민과의 결혼을 선택했었다.
그리고 이후 지속된
남편과 친구의 불륜 관계에 대해서도 이미 성현은 상세히 알고 있었다.
결국 스스로
통제한다고 믿고 있었던 그녀들 사이에서,
정작 통제당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재민은 자동차
트렁크의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직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희가 던진
백설공주의 이야기는 이러한 그들의 관계를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마녀가 재민이었다면,
그의 완전무결함을
비춰내는 거울은 곧 그의 아내 성현이 된다.
그러나 거울에
투영된 완벽한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마녀는 백설공주를 제거하려 드는데,
성현이라는 그
거울을 두고 마주한 백설공주는 바로 가희가 되는 것이다.
마녀가 건넨 독이
든 빨간 사과는 순결한 백설공주를 파멸시키기기 위한 것이지만,
사과에 독이
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백설공주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든다.
빨간 색이 환기하는
성적 이미지를 고려한다면,
결국 가희의
독사과는 그녀에게 지독히도 가학적인 재민과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세 번이나 아이를 잃게 되는 상처로 드러난다.
그러나 마녀가
만족스럽게 바라 본 거울의 표면 그 자체가 허구였으며,
거울에 투영된 모습
또한 한낱 미몽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백설공주인 가희에
의해 낱낱이 폭로된다.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로 인해 무너지는 마녀처럼,
마침내 극단적
나르시시스트인 재민 또한 파멸의 길에 들어선다.
“모든 거울은
거짓이다.
굴절이다.
왜곡이다.
아니
투명하다.
아무 것도 반사하지
않는다.
그렇다.
거울은
없다.”라는 소설의 마지막
대목처럼,
연극에서의 가희
역시 “지금은 없”는 재민의 거울에 대해 최종적으로
선언한다.
그 실체를 외면한
채 환영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거울의 표면과
이면의 관계,
혹은 거울 그 존재
자체를 통해 다시 한 번 무대 위에서 신랄하게 꼬집어 내는 것이다.
‘연극만이
보여줄 수 있는 미학’
그러나 이미지의
포로로 살아가는 현대인에 대한 현 시점에서의 폭로는,
거대 담론의 위기와
몰락 가운데 더 이상 자신을 객관화 하여 비춰낼 거울을 가질 수 없게 된 1990년대 시점에서의 공감을 재현해 낼 만큼
충격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원작의
주제의식에 대한 재해석이 누락된 <거울 뒤 여자>가 주력할 수 있는
것은,
무대 위 표현의
문제로 남겨진다.
“가장 고심한
부분은 연극만이 보여줄 수 있는 미학”이라고 연출가 김봉건이 스스로 밝힌 것처럼
말이다.
(「프리뷰-욕망의 트렁크,
피투성이의
나르시시즘」,『한국연극』2012.5,
한국연극협회,
12쪽)
사실 이 작품은
연극으로 각색되기에는 태생적 난점을 지니고 있다.
밀폐된 자동차
트렁크 안을 배경으로,
철저한
나르시시스트인 남성 주인공 ‘나’의 시점에서 오롯이 사건이 서술되는 것은
물론,
‘나’가 미처 포착하지 못한 또는 포착하지 않은
정부 가희와 부인 성현의 비밀스러운 관계 또한 매우 미묘한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리적 공간과
주인공의 내면을 시각화하기 위해서 여러 고민들이 수반되었으리라는 예상은,
그러기에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무대 위에 놓인
투명한 아크릴 상자들은,
바로 이러한 고심에
대한 연출의 일차적 응답이었을 것이다.
좌우 양쪽과 무대
중앙에 놓인 세 개의 상자는,
때때로 교각이나
의자 등의 공간으로 활용되지만 주로 폐쇄된 트렁크 공간을 상징하게 된다.
좁고 어두운 공간
안에서 서서히 지쳐가며 죽어가는,
피폐한 두 남녀의
육체는 투명한 상자를 통해 관객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각각의 아크릴
통 안에 든 남녀가 홀로 혹은 함께 존재함으로써 죽음을 목전에 두고 물질적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여전히 정신적으로 단절된 관계를 적절히 표현해
내게 된다.
그리고 아크릴 내의
공간과 그 외부의 공간을 분할,
인물들이 그것을
넘나들 수 있게 하여,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며 숨겨진 인물의 과거나 내면의 무의식을 폭로하도록 만들고 있다.
하지만,
각각 일층과
이층에서의 두 번의 관극 체험의 질이 현저히 달랐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전면이 막힌 아크릴
통은 때때로 배우의 발성 그 자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 버렸다.
이 외에도 녹음기를
통해 녹음된 주인공들의 독백이 중요한 계기마다 날 것 그대로 흘러나와 오히려 몰입을 저해하거나,
인물의 무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스크린 위의 이미지들이 지나치게 노골적이어서 ‘풍부한 예술적 표현’과 ‘연극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미학’을 찾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너무나 익숙한 작품이었기에 새로운 무대적 표현을 과하게 기대했던 필자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알’을 깨고
나와 비상하는 법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가희는 어쩌면
프랑스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을지 모를 성현을 생각하며 소설 <데미안>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자신의 알을 깨고
나와 홀로 비상할 성현을 상상하면서 그녀는 재민과 함께 자신만이 그 알에 갇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몸부림
친다.
거울 뒤의 진실과
사라진 거울을 목도하며 그것에 좌절하거나 냉소하는 것,
혹은 그 거울을
애도하는 것은 1990년대적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어느덧 이십여 년이 흘렀다.
거울의 허구를 이미
선험적으로 받아들이며,
사람들은 이제
그것이 만들어낸 다종다기한 이미지의 형상과 그 힘에 보다 집중하고 있다.
또는 여전히
개인에게라도 유효할 보편의 거울을 구상하려 애를 쓰기도 한다.
즉 사라진 거울의
자리에 무엇이 생겼는가,
혹은 우리는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를 예리하게 조망하며 탐색하는 시점에 이미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극
<거울 뒤 여자>가 적어도 때늦은 회고담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알’을 깨고 나와 비상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좀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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