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 삼합(작가, 배우, 연출)의 상승적 상호작용의 아름다운 결실
최고 관리자 / 2012-08-21 / 조회수 8591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
삼합(작가, 배우, 연출)의 상승적 상호작용의 아름다운 결실
권경희(연극평론가, 명지전문대학교수)
발가벗은 채 잠든 생모의 허벅지 사이, 시들은 음부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소년은 밖으로 나와 무심히 자위를 한다. 문득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하자 소년은 돌을 집어 들어 그 머리를
박살낸다. 골수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신다. 소년에겐 아무런 느낌이 없다. 때와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는 그의 성적 욕망. 병적인 성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소년, 브뤼노는 문학선생이 되지만 결국 정신병원이 그의 최종적인 거처가 된다. 브뤼노의 이부동생 미셸은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모른다. 우정을 나눌 줄도 사랑을 받을 줄도 모른다. 때때로 그를 찾아오는 형 브뤼노의 이야기를 습관처럼 들어 줄 뿐 그의 일과는 오직 일
뿐이다. 그는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의 과학자로 이름을 남긴다.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의 주인공들이다. 죽음과 고통과 고독이 지배하는
우엘벡의 소설은 성적 코드로써 서구의 정치, 경제, 문화의 변천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면서, 복제인간들로 대체되는 인류의 우울한 미래를 예고한다.
부모의 관심과 따뜻한 보살핌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브뤼노와 미셸이기에 이들의 황폐한 삶과 영혼의 상처는 더욱 통렬하다.
길게 소설을 언급한 까닭은 얼마 전 세종M씨어터에서
공연되었던 신시컴퍼니의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와 관련된다. 하타자와 세이고가 쓴 이 작품에서 문제학생들의 냉혈적 폭력성의
원인과 동기에 관한 이해의 통로가 막혀버리면서 어느 순간, 브뤼노와 미셸의 이상성격과 행동을 부분적으로 부모와의 관계의 부재로 이해했던 내
기억이 무의식중에 포착된 것 같다. 연극 속 여중생 남윤정, 진서영, 유다현, 김지수, 이예림의 가정환경은 언뜻 보면 다복한 편이거나 적어도
보통은 되는 편에 속한다. 대기업 간부인 아버지와 학교운영에 적극적인 엄마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는 남윤정은 별도로 치더라도, 아버지가 죽자
엄마가 재혼하면서 선량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슬하에서 생활하는 이예림이나, 화목했으나 아버지의 실직으로 알게 모르게 경제적, 정서적 변화를
겪고 있을 유다현, 아버지 없이, 사업상 바쁜 그러나 딸을 무척 걱정하는 엄마와 함께 사는 진서영,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교사 아버지와 순종적인
교사 엄마를 둔 김지수 등은 유난히 문제 있는 가정이라기보다는, 이런저런 불편하고 불합리한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살아가는 대다수 가정의 형태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 여중생들이 담합해 같은 반 친구 손민아를 이유 없이
따돌리고 지속적으로 폭력적 권력을 휘둘러 이를 견디다 못한 손민아가 끝내 교실에서 목매어 자살하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이들을 유심히 보게
된다. 맑은 눈망울과 투명한 영혼으로 순수의 결정체일 것 같은 중학생 소녀들이 행사한 폭력적 권력이란 경악스럽게도 위협에 폭행, 갈취를 넘어
심지어는 원조성매매까지도 포함한다. 게다가 이런 고통스런 상황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거짓말을
지어내고 친구의 죽음을 비웃고 조롱할 뿐 아니라 태연히 게임을 하고 배고프니 피자나 시켜 달라는 ...!! 좋아하진 않았더라도 같이 생활한
친구의 죽음 앞에 그 철면피 같은 당당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 모든 내용은 당사자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통해 진술되므로 우리는 이들을 보지
못한다.
부모로부터의 무관심과 애정결핍이 브뤼노의 병적인 성충동과
미셸의 자기파괴적 공허감을 불러왔다면, 전폭적인 관심과 모자람 없는 애정을 받고 있는 이들 여중생들의 생명파괴적 폭력성은 과연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평범한 중학생이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기를 겪을 시점이지만 선과 악의 본질조차 구분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들은 의도적으로 악을 선택한 것일까? 도대체 왜? 그들에게 최소한의 이해와 관대함과 연민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욕심인가?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이 사악한 상황의 전모를 조사하기 위해서 문제의 학생들을 단 한번도, 단 한명도 무대로 호출하지 않는다. 격앙된
분노와 체념적 허탈이 추측되는 짤막한 한 문장의 타이틀도 그렇거니와 실제로 사건의 전말을 캐기 위해서 학교상담실로 호출된 사람들은, 오직
가해학생들의 보호자들이다. 따라서 그 자리의 구성원은 모두 어른들인 것이다. 극 속의 허구적 현실이 정확히 우리의 실제 현실인 바에야, 모든
부모들이 터를 일군 기성사회, 그 속에 만연하는 개인주의와 도덕적 부패, 사회적 무책임과 가치 없는 가치관을 무차별 방사하는 모든 성인들은 숨을
곳이 없어진다. 이렇듯 상황을 규명하기 위한 액션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그 액션이 끌고 가는 최종지점은, 사건의 진상파악과 더불어
학교폭력의 궁극적인 해결책과 그것의 근원적인 제거에 대한 고민인 셈이다. 불완전한 생명을 건강한 인격체로 성장시키는 데에 있어 가족과 학교라는
크고 작은 제도들은 진정 어떻게 제도(濟度)적 역할을 할 수 있는가하는 반성적 기류가, 무대 뿐 아니라 객석 전체에서도 느껴지는 것 같다.
사실 ‘왕따’ 혹은 ‘이지메’라는 현상적 명칭이 오늘날
신조어로 등장했을 뿐, 그리고 작품 속에서 물질주의 시대의 피붙이인 ‘원조교제’와 엮였을 뿐,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제도교육이 시행된 이래
교육환경문제는 여러 가지의 형태와 성격, 다양한 양상으로 항상 존재해 왔다. (다시 <소립자>를 상기해 보면, 1960년대 후반
중학생 브뤼노는 오늘날의 왕따와 비슷한 집단적 따돌림의 표적이 되어, 집단적 구타와 성적 학대, 폭력적 가혹행위로 공포의 하루하루를 필사적으로
견뎌낸다.) 느리고 더뎠던 전 시대와는 달리, 고화질의 TV모니터와 특히 인터넷, 아이팟, 스마트폰 등의 매체를 통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격분할
시청각적 이미지가 광속으로 무차별적으로 확산됨으로서 항상 존재해 왔던 문제가 시의적인 잇슈로 탈바꿈한 것뿐이다. 따라서 ‘왕따’문제를 긴장감
있게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사실상 시의적이지 않으면서 항상 시의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사상과 의식에서 호소되는 초월적 보편성은 차라리 이
작품을 고전적인 범주가 어울리게 한다.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공연의 정직함이나 품격에 있어 결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을 점령한 공연이란 생각을 속으로만 가두고 싶지 않다. 분명
무겁고 부담스러운 주제이건만 시종일관 눈을 반짝이며 무대를 주시하게 만든 힘은 두말할 필요 없이 관록 있는 배우들과 짜임새 있는 희곡으로부터
나왔음은 명백하다. 많지 않은 대사에 겉으로 드러나는 움직임이 거의 없는데도 더할 나위 없이 생생히 인물을 살려낸 손숙(이예림 조모), 절제와
자유로움을 기민하게 오가며 장면의 중심적인 역할을 균형 있게 수행하는 길해연(남윤정 모), 투박한듯 하면서도 지능적이고 솔직한듯 하면서도
이중적인 김지수 아버지 역할에 이보다 더 적합한 배우가 있을까 싶은 이대연, 꼭 필요한 만큼의 거드름과 교만으로 인물의 개성을 살린
손종학(남윤정 부) 등은 특히 인물에 대한 신뢰감과 장면의 현실감을 살리는데 앞장선다.
하타자와 세이고는 개인적으로 처음 접하는 일본극작가인데
작품을 일구는 솜씨가 돋보일 뿐 아니라, 특히 절제 속에서 순간순간의 생명감을 증폭시켜나가는 장면구성은 놀랍기까지 하다. 사실은 올 상반기를
맺음하는 즈음에 명동예술극장에서 봤던 <그을린 사랑>의 텍스트에 크게 매료됐던 터라, 아직은 그 여운이 또렷이 살아있음에도 하타자와
세이고를 알게 된 건 분명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언어와 움직임을 제한하면서 상상적 액션을 최대치로 이끄는 극작술은 작가적 내공과 예술적
지향점을 동시에 가늠케 하는데, 김민정의 각색은 작가의 장점에 빛을 더해 준 것 같다. 기능적으로 편의적으로 작동하는 이 시대를 반영하듯,
작품의 언어는 군더더기가 없음에도 인물들의 감정구조와 숨기고 싶은 내면의 복잡한 층위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 인물들 간에 흐르는
불편함을 유지하고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가운데 불필요한 힘을 뺀 채 은근슬쩍 끼어드는 코믹성은 더없이 효과적이기까지 하다. 편지장면을 예를 들어
보자. 손민아가 자살하기 전에 쓴 편지가 차례차례로 네 번 등장하는데, 비슷하지만 전달될 대상에 따라 약간씩 다른 내용으로 꾸며진 그 편지들의
제일 마지막엔, 하나같이 똑같은 순서로 가해학생들의 이름이 호명된다. 그런데 두 번째와 세 번째 편지가 등장할 때 그리고 그 편지낭독의 끝 부분
문제학생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 안타까운 죽음 위에 펼쳐진 상황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즉,
편지를 불태우고 또 씹어 삼키면서까지 증거를 인멸하려했던 남윤정모의 극악스런 행동과 맹목적인 보호본능이 세 번째 편지의 마지막 부분, 역시
“남윤정”을 필두로 이름들이 호명될 때, 객석은 말 그대로 웃음바다가 된다. 이쯤 되면 반복과 찬스의 포착이라는 심플한 도구로서 웃음을 유발하는
작가의 재치와 기교를 모른 체 할 수 없게 된다. 고조된 궁금증과 호기심을 그 내용으로 하는 서스펜스와, 정서완화제로서의 돌발적 코믹성의 조합과
배분은 지능적이면서도 감각적이기 때문이다. 관찰의 대상과 응시의 목적 사이의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관객의 마음의 움직임을 노련하게 꿰는
드문 작가란 생각이 든다.
좋은 공연을 위해서 좋은 희곡은 절대적 요건이지만 좋은
희곡이 좋은 공연으로 완성되는 경우는 의외로 드물다. 이런 측면에서 하타자와 세이고는 대단히 운이 좋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김광보의 연출로
무대화된 이 작품은, 뜬금없게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옛날의 내 지도교수 피터 톰슨을 생각나게 한다. 내 눈엔 완벽해 보이는 에세이건만 사정없이
문장을 동강 내고 고심을 거듭해 선택한 단어건만 야박하게 좍좍 지워버리고 ... 그런데 그렇게 고쳐준 문장들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사에 형용사, 동명사, 관계대명사 따위로 덕지덕지 꼬리를 잇는 긴 문장들은, 한 줄, 혹은 두 줄 문장으로 완전히 개체분리 된 채 꼭 필요한
수식어를 제외하곤 다 삭제되어 버렸다! 희한한 건 그렇게 다 쳐낸 문장들이 어찌나 정직하고 명쾌하고 우아하던지 ...!
이번에 김광보의 연출이 그랬다. 불필요한 장식이나 과시적인
기교, 우연적인 속성들을 벗어버리고 옹골진 알맹이만 남기니 무대는 정직하고 명쾌하고 우아한 생명감으로 충만했다. (비단 연출가에게만 해당되지는
않는) 스타일은 그 사람의 내면의 질서와 품위에서 나온다. 그것들이 습득된 것이건 직관적인 것이건 간에 스타일 속엔 그 사람의 자의식이 반영되기
마련이고, 스타일을 고집한다는 것은 형식적 완성에 대한 집착이거나 자의식에 대한 애착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김광보의 대부분의 공연들에선 대체로
스타일의 흐름이 읽혔었다. 그 스타일은 열려있는 시공간성, 양식적인 장면전개, 상상적이면서 밀도 있는 움직임, 응축된 에너지 등이 서로 긴밀하게
작용하면서 이끌어내는, 현실과 구분되는 실제성(actuality)과 독특한 관념적 분위기 등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그런데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에선 특유의 스타일보다는 텍스트의 본질과 핵심을 유독 고집하고자 했던 것 같다. 형식에 대한 집착이나 예술적 자의식이
텍스트와 배우라는 기본적 요소들에 대한 연출의 신뢰감 뒤로 물려진 듯싶은 것이 여느 때와는 달랐다.(그럼에도 공연에선 김광보의 감각이 예민하게
포착되었다! 이 부분은 보다 집중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탄탄한 텍스트와 준비된 배우들로부터의 자율적인 진행을 날카롭게 지켜보는 일이야말로 모든
연출이 소망하는 환경이리라. 의미 없는 실랑이로 낭비되는 많은 순간들이 경제적으로 축소될 때 연출이 전문가의 역량을 발휘 할 수 있는 시점은
빨리 준비되기 때문이다. 전체성 안에서의 조화와 균형을 의식하며, 적절한 타이밍과 에너지의 앙상블, 다양한 파장으로부터 적절한 톤을 찾아내는 등
연출의 감별력과 창조적 예술성이 이번 프로덕션에서 유감없이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내친 김에 하나만 더 얘기하자. 무대 위 상담실 내부에서의
액션만큼이나 미닫이문 밖에서의 상상적 액션도 극 전개상 의미심장하다. 말하자면 무대 밖 가해학생들이 서로 격리된 채 가해학생 한 명에 동반 선생
한 명씩이 머물고 있는 공간 말이다. 극적 사건과 연관되면서 무대 위의 인물들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이끄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결정적인
‘정보들’이지만, 그 인물들의 내면을 원격조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무대 밖 학생들의 비가시적 ‘존재성’이기 때문이다. ‘설마 내 아이가 그럴
리 없다’, ‘가엾은 내 아이가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혼자 있다니...’하는 생각에 조바심을 내고 극도로 예민하게 행동하게 되는 심리적 배경이
된다. 이처럼 극중 인물들의 액션공간과 상상적 공간의 미묘한 상호연관성으로부터 생성되는 정서적 실제성은, 무대장치(특히 상부는 유리로 하부는
목조로 벽을 만든 상담실의 가로 벽)가 크게 협조하기도 하지만 극 전체를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데서 조금도 방심하지 않는 연출의 존재성 없이는
아무래도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글을 쓰고 보니, 꽤나 칭찬 일색인 것이 비평가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부끄러워진다. 좋은 공연을 비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지라 그 어려움을 내려놓고 싶은 유혹도 있었거니와 내 눈에
대해 정직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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