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쥬코
최고 관리자 / 2012-06-21 / 조회수 8756
로베르토
쥬코
구현경 (건국대 박사과정)
극단:
아우라
원작: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연출:
성준현
상연일시:
2012.06.01.~2012.08.15.
상연장소:
동숭무대 소극장
관극일시
: 2012.06.01
호국의
달을 맞아 호접이 상연 중이었다. 김사량의 호접을 보기로 되어 있었다. 공연시간에 딱 맞춰 도착하나 했는데 공연장을 잘못 찾았다. 단원직원들이
웃으며 '로베르토 쥬코'를 보라고 권한다. '로베르토 쥬코’는 마흔 한 살의 젊은 나이에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의 1988년작이며 유작이다. 14세에 친부모를 살해한 탈옥수 로베르트 쥬코의 실화를 다룬 희곡이다.
사실
필자는 영상매체에 더 현혹되어 있었다.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과 동시에 연극계에 입문한 초보 분석가라 할 수 있다. 연극을 좋아하지만 모든 연극을
좋아하지 않는다. 필자의 시각은 일반대중과 유사하다 하겠다. 서두가 긴 이유는 부조리극에 대한 무지와 연극을 편식하는 어슬픈 분석가의 변명이다.
과거의
예술은 대중들에게 아득히 먼 곳에 위치했지만 오늘날의 예술은 근접한 거리에 있다. 그러나 호불호가 분명한 현대인들은 자신의 정서와 기호에 맞지
않으면 외면한다. 무한경쟁인 삶의 속도와 과부하에 걸린 정보량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말 그대로의 휴식을 원케 만든다.
황금같은 쉬는 시간만큼은 머리를 쓰고 쉽지 않고 쉽다.그래서 더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스팩터클에 현혹되는 것이다. 이는 현대인들은 무지하고
단순해서 아니라 과부하에 걸려 뇌의 회로가 피로해져있음을 반증한다.
어려운
연극들 중 더 어려운 부조리한 연극을 보면서 뇌의 피로함이 몰려왔다. 언어로 명확히 포착할 수 없는 무수한 상징들. 내 무지와 설익은 지식을
탓하며 긴 시간이 흘렀다.
쥬코가
왜 살인을 했는지는 모른다. 차례로 친부모를 살해하고 탈옥한 후 자신을 쫓던 형사도 죽이고 심지어 인질로 붙잡은 어린아이 머리에까지 방아쇠를
당긴다. 여자 인질과 피신도중 대화를 나누던 쥬코역을 맡은 배우가 관객을 보며 말한다.
쥬코
: 저 미친 사람들을 봐요. 저들의 저 심술궂은 태도들을 봐요. 살인자들이에요.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살인자들을 보기는 처음이에요. 머릿속에
약한 신호음이라도 울리면 저 사람들은 서로 죽이려고 덤벼들거에요. 왜 지금 저 사람들 머릿속에서 신호음이 울리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저 사람들은
모두 죽일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저 사람들은 실험실의 철창 안에 있는 모르모트 같아요. 저 사람들은 죽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
욕구가 얼굴에 행동거지에 다 나타나요.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움켜쥐고 있겠죠. 난 한눈에 살인자를 알아볼 수 있어요. 살인자들은 옷이 피로
물 들어 있죠. 여긴 살인자 천지네요.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 해요. 살인자들을 똑바로 쳐다보면 안돼요. 저들이 우릴 보면 안돼요. 투명해
져야 해요. 그렇지 않고 저들을 똑바로 쳐다보면, 우리가 저들을 쳐다본다는 걸 저들이 눈치 채면, 우리를 쳐다보고 그 사실을 알아채기
시작할거고, 그들의 머릿속에서 신호음이 울리면 저들은 죽여요, 죽일거예요. 한사람이 시작하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람을 죽일거예요.
모두들 머릿속에 신호음 소리밖에 못 들어요.
서구
근대철학가의 대부분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인간이란 현존재에 대한 환멸과 부정성을 이야기 하고 있고 ‘로베르트 쥬코’ 역시 그러한 맥락과
맞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바타이유는 인간의 살해욕망에 관해 단언했다. 성욕처럼 강하지는 않지만 인간에게는 살해가능성이 잠재해있음을. 쥬코는
극을 보고 있는 관객들을 향해 ‘너희들 모두다 잠재적인 살인자’라고 말한다. 살인자 쥬코와 관객의 입장이 역전된다. 쥬코의 눈빛에 압도되어 지금
여기의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인간의 살해욕망에 대해 사유해 보았다.“죽여버려”라는 흔한 욕설이 공포나 억압을 주기 위한 은유가 아니라 진실일 수
있다. 살면서 간혹 타자의 살기를 느껴본 적 있다. 시기, 증오, 질투라는 감정의 편린들. 니체가 말한 ‘악의 눈길’은 또 다른 말로 치환하면
살기일 수도 있다. 아니, 본인 역시 그런 눈길을 보낸 적 없었다고 부인하지 않겠다. 법이라는 상징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는 공포과 혼란
그 자체일것이다. 억압과 규율권력의 횡포니 뭐니 해도 제도권 안의 삶 안에서만 인간은 안전감을 느낄 수 있는 양가적인 존재들이다. 또한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는다 해서 누군가를 해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간만이 사용하는 세련된 언어로 타자들을 무수히 찌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18명의
배우들의 연기는 안정적이었으며 진정성이 있었다. 사이사이 들어가는 안무도 인상적이었다. 어려운 번안 희곡을 관객들에게 인지시키기 위해 고심한
연출의 흔적이 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관객인 필자는 난해하고 어려웠다. 친부친모 살해, 유아 살해, 처녀성 상실 등. ‘로베르트
쥬코’는 다층적인 메타포를 내재하고 있다. 학위논문이나 학회 등재지에 관련 논문들이 더러 수록되어있다. 마리 콜테스는 사무엘 베게트 이후 가장
극찬 받는 프랑스 극작가라 한다. 어렵겠지만 한국 연극계에서의 수용에 관한 전공자들의 깊이 있는 연구가 진척되어야 한다고 본다. 연극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는 이 지점에서 정통연극을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극단측의 의욕은 높이 사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결국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연극은 예술을 위한 예술, 그들만의 리그 로 남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
5분 동안 쥬코에게 순결을 잃은 여자아이의 언니는 왜 전라로 샤워를 하며 울었는지 이해불가였다. 희곡에서는 전라가 아니었다. 덩치가 있어 보이는
여배우의 전라는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연상시켰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앞모습은 같은 여성으로서 민망하고 불편했다. 무조건 벗는 것에
대한 편견을 가진 것이 아니다. 여배우의 나신이 극의 흐름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부조리극의 외피를 쓰면 어떤 유기적 관련 없는
장면도 가능한 것인지 연출의 의도를 파악하기에 필자는 너무도 대중적인 관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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