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과 무의식의 이중주 - 연극 토스카나
최고 관리자 / 2012-06-21 / 조회수 8219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주 - 연극
토스카나
라시내(TTIS
기자)
관람일시: 2012.05.20.
16:00
작 : 세르지 벨벨
연출 : 서충식
출연 : 정일균, 고서희, 박경옥, 안영주
공연장소: 아리랑 아트홀
여기 오래된 연인 혹은 부부가 있다. 둘은 죽고 못 살게 사랑했지만―어쩌면 지금도 사랑하지만―이제는 서로가 참을 수 없이 지긋지긋해졌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이유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변해버린 상대방을 단 한 순간도 견디기가 힘들어졌을 때, 사랑은 악몽이 된다. 변해버린 사랑이 죽을 만큼 괴롭지만 이 악몽에서 깨어난다면, 사랑을 잃는다면 그 또한 삶이 다 끝난 것이나 다름없을 것만 같은, 그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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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와 조아나는 결혼기념일을 맞아 예전에 둘이 가장
행복했던 장소인 토스카나에 ‘다시’ 가기로 한다. 기대에 부푼 마르크가 샤워를 하러 들어간 사이 전화벨이 울리고, 마르크는 조아나에게 전화를 받으라고 소리쳐 보지만 어찌된 일인지 조아나는
없어졌다.
아니, 분명 조아나는 무대 앞쪽 침대에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데 마르크는 조아나가 없어졌다고
한다.
초조해하고 당황해하는 마르크의 모습과 조명의 변화가 맞물려
미스테리한 분위기가 무대를 감싼다. 잠시 후 이유를 알 수 없는 비명과 함께 마르크가 욕실에서 쓰러지고, 이 때 조아나가 문득 일어나서 욕실로 다가서면 마르크가 해골을 들고 일어나서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묻는다.
조아나가 대답한다. “어디 당신을 죽이고 싶은 사람이 나 뿐이겠어?”
암전이 극중 시공간을 뛰어 넘을 때 관객의 상상력은 그
시간의 비약을 채운다.
관객이 자연스럽게 ‘마르크가 죽은 건가? 누가 마르크를 죽였나? 조아나가 죽였을까? 어째서 마르크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이 많다고 하는 걸까?’ 등을 궁금해 하며 극을 따라갈 채비를 하는 사이, 다시 조명이 밝아지면 마르크는 바에서 친구 라울과 토스카나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어라? 마르크가 죽지 않고 토스카나에 다녀왔군?’, 관객은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이내 이런 식의 비논리적인 전개가 반복되면서, 관객은 차차 어떤 장면은 마르크의 꿈이고, 어떤 장면들은 현실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극의 중반쯤 되면 ‘마르크가 악몽에 시달린다’든가 ‘꿈에서는 전화기가 울린다’든가 하는 정보가 마르크와 조아나의 입을 통해서 나오고, 관객은 더욱 확신을 할 수 있게 된다. 현실과 환상의 구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연출적 배려는 조명의 활용으로
나타난다.
현실일 때는 자연광에 근접한 백색조명이, 꿈일 때는 붉은 톤의 조명이 사용되면서 그로테스크함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주의적 연기와 과장되고 상징적인 표현을 오가는 배우들의 연기 톤의 변화도 이러한
구분을 용이하게 해 준다.
특히 조아나 역의 고서희는 현실의 조아나가 남편에게 지쳐가는
모습을 매우 섬세하게 잘 표현해냈다. 서로 속에 쌓인 게 많지만 소통이 되지 않는 연인의 심리를 매우 현실적으로 포착한 대사와
이를 설득력 있게 살려낸 연기 덕분에, 뒤죽박죽인 서사가 언뜻 잘 이해가 안 되는 순간에도 그 상황의 호소력에 빨려 들어가
공감할 수 있었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극의 전개가 다소 혼란스러우면서도
극을 이끌어 나가는 집중력을 잃지 않는 것은, 이 비논리가 인간의 의식과 기억, 욕망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와 조아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라울과 에바는 꿈과 현실을 오가는 속에서 반복적으로
토스카나 여행이 어땠냐고 묻는데, 그 때 그 때마다 마르크의 대답은 다르다. 이것이 매번 다르다는 점이 논리적으로는 이상하면서도 극의 맥락 속에서 크게 이상하지가
않다.
사실 사람들은 매 번 같은 질문을 받더라도 상황에
따라서,
혹은 기분에 따라서, 대화하는 대상에 따라서 조금씩은 다르게 말하게 마련이지 않은가?
꿈에서 나타나는 왜곡된 정보들 또한 극중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마르크는 죽을병에 걸렸다고 고지를 받지만, 사실 죽을병에 걸린 것은 라울이다. 마르크는 에바로부터 조아나가 얀이라는 이름의 내연남이 있다고 듣지만, 나중에 얀은 에바의 연인으로 밝혀진다. 기억 속에서 중요한 사람들의 이름이 바뀌거나, 세부적인 내용이 왜곡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두 번 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기억이 현실과 어긋날 때, ‘어? 내가 꿈을 꿨나?’ 하는 생각도 누구나 한 번 쯤은 해보지 않았을까? 마르크의 무의식과 의식이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지점에서 관객들은 잘못된 정보의 수정을 통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감과 동시에, 그렇게 잘못 기억하고 잘못 꿈꿀 수밖에 없는 한 남자의 심리를 짐작하게
된다.
마르크의 꿈에서 라울이 아니라 자신이 병에 걸렸다고 뒤바뀐
것은,
우울과 무기력, 의심으로 점철된 병적인 정신 상태에 대한 마르크의 자기 인식인
것이다.
환상 속에서 마르크의 주변인들은 철저하게 마르크가 바라보는
대상으로만 나타난다.
이러한 마르크의 시선 속에 마르크의 욕망이
드러난다.
조아나에게 얀이라는 내연남이 있다고 에바가 마르크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은 마치 에바가 마르크를 유혹하는 것처럼 에로틱하게 그려진다. 아내에게 애인이 있다는 내용 자체는 조아나가 외도를 한다는 의심을
반영하고,
에바를 성적 대상으로 표상하는 것은 마르크가 대체물을 갈구해야할
만큼 욕망이 충족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욕망의 결핍에 따른 불만은 환상 속에서 목을 졸라 죽이는 등의 폭력으로
해소되거나,
무의식의 세계에서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해소된다. 마르크는 꿈속에서 전쟁통에 위험에 빠진 조아나와 에바, 라울을 구해준다. 꿈속에서라도 어떻게든 관계의 위기를 해결하고 조아나의 영웅이 되지 않으면 마르크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장면은 코믹하면서도 ‘어디서 본 듯하게’ 그려지면서 관객들의 웃음을 유한다. 때로는 에로틱하게, 때로는 스릴러물처럼, 때로는 유쾌하게 나타나는 환상의 변주는 특정한 연출 코드를 가미하지 않고
그려지는,
다분히 심각한 마르크의 현실과 대비되면서 연극의 재미를
끌어올린다.
토스카나에서의 마지막 10분 동안 마르크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서 마르크는 변했다. 그 후로 마르크와 조아나의 사이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마르크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악몽은 전화와 관련이 있다. 마르크는 조아나가 바람을 핀다고 의심한다.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이야기 속에서 일련의 정보들을 조각조각 알아낸 관객들에게 이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토스카나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지막 장면에서 마르크와 조아나는 토스카나에
‘다시’ 간다. 여기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토스카나가 극의 무대가 된다. 토스카나에서의 마지막 10분, 조아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마르크는 조아나의 핸드폰에 남겨진 메시지를
듣는다.
단순히 잘못 걸린 전화일 수도 있고, 과거로부터 온 마르크 자신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조아나의 내연남일 수도 있는, 그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목소리를 듣는다. 극의 자연스러운 시간 흐름을 따라서, 갈라섰던 마르크와 조아나가 라울의 유언대로 다시 잘 해 보기로 했구나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 장면은 연극의 에필로그가
되고,
이들은 세 번째 토스카나에 간 것이 된다. 또한 관객들은 이 장면이 예전에 둘이 토스카나에 두 번째로 갔을 때의 일을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보여준 것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연극은 관객의 해석을 열어 놓는다.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모든 사건들이 논리적으로 딱 떨어지지는 않으며, 그렇다고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이미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꿈,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넘나들며 두 시간 여 동안 펼쳐진 연극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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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를 쓴 세르지 벨벨(Sergi Belbel)은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로, 현재 까딸루냐 국립극장(Teatre Nacional de
Catalunya)의 예술감독이기도 하다. 이번 연극을 통해서 동시대 작가의 흥미로운 희곡을 접하게 되어서 무척
기쁘다.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와 삶과 죽음의 문제, 현실과 비현실의 문제가 복잡하면서도 느슨하게 얽혀 있는 텍스트라서,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과 무대화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적으로 이번 연극 <토스카나>는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을 무의식이라는 큰 줄기로 잘 풀어냈다고
생각한다.
비논리적인 텍스트에 대한 굉장히 논리적인
접근이었다.
특별히 뛰어난 감각이 돋보이는 부분은
없었지만,
개개의 장치들이 극의 구조를 밝히는 데 충실히 기여하면서 희곡이
원래 가진 골격을 잘 드러냈다. 현실과 비현실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정형화해서 제시하는 방식이 이러한 잠재적 해석의 두께를
납작하게 만드는 측면은 분명 아쉬웠다. 그러나 어디까지를 분명히 제시하고 어디까지를 중층적으로 제시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에 따라
가중될 수 있는 관객의 혼란을 감수해야하는 것이고, 이에 따른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앞뒤가 잘 맞는 이야기의 구성 방식에 관습적으로 이미 익숙한 관객들은 혹시 연극이 낯설고
어렵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려워서 지루하다고 느낀 관객은 없었으리라고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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