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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일자 2012-04-21(토) ~ 2012-05-13(일)
공연장소 국립극단 소극장 판
공연시간 화-금 7시/ 토.일 3시 (월 쉼)
관람등급 만 15세 이상
출연자 윤종구, 장지아, 한세라, 안경희, 주홍균, 김형석, 이정수,이혜정, 김동원, 정현철, 권민수, 노수산나
티켓가격 20,000원
러닝타임 180분
제작 주최/주관: (재)국립극단
공연문의 1688-5966
홈페이지 http://www.ntck.or.kr
할인정보 프리뷰할인(10,000원,4/21-22공연에한함) 청소년(15,000원-24세까지) 19세이하청소년(10,000원-소년소녀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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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으로 연극하기의 의미

단막극으로 연극하기의 의미

최고 관리자 / 2012-07-19 / 조회수 7954

단막극으로 연극하기의 의미

국립극단의 단막극 연작

 

배선애(연극평론가)

공연명 : ‘단막극 연작

<방문> : 장성희 작, 손진책 연출

<꽃과 건달과 피자와 사자> : 최치언 작, 박근형 연출

<-깃털의 유혹> : 김수미 작, 윤호진 연출

제작 : 국립극단

공연기간 : 2012.04.2405.13.

공연장소 : 국립극단 소극장 판

 

창작 단막극과 국립극단

 

국립극단이 2011년 봄, 새 옷을 갈아입으면서 야심차게 기획한 것 중 하나가 새 판에서 다시 놀다의 제목 하에 공연된 <파수꾼>, <흰둥이의 방문>, <전하>였다. 이 공연이 주목받는 것은 우리나라 희곡사에서 기억될 만한 대표적인 196070년대 단막극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과, 김승철, 윤한솔, 김한내 등 젊고 유망한 연출가들을 통한 신구의 조합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단막극 세 편을 다양한 색채의 연출가들이 모여 함께 공연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이 기획의 의도는 올해도 이어졌다. 지난 424일부터 513일까지 서계동에 있는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공연된 단막극 연작이 그것이다.

사실, 단막극은 일반적인 극단에서는 공연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단막극 자체는 가장 최소한의 구성요소로 상당한 작품의 밀도를 요구하는 동시에 매우 다양한 연극적 실험들이 행해질 수 있는 토대라는 점에서 큰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공연에 적합한 작품을 창작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상대적으로 짧은 공연 시간에 비해 그것에 들이는 노력은 장막극에 버금가기 때문에 간단한 워크숍의 형태가 아니고서는 완성된 공연의 형태로 관객들과 만나기는 어렵다. , 그 필요성은 인정하나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쉽사리 공연되지 못하는 것이 단막극 공연의 딜레마인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단막극을 지속적으로 공연하는 국립극단은 그 자체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어지간한 기획사나 극단에서 쉽게 덤벼들지 못하는 작업을 국가에서 지원하는 국립극단이 솔선수범하여 진행한다는 것은 국립극단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단막극은 아무래도 주제에 대한 집중도와 문제의식 때문에 작가에게 더 많은 관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 단막극 연작은 작년과는 달리 장성희, 최치언, 김수미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신작을 대상으로 하였다. 사회 현실, 혹은 근원적 인간 존재에 대한 작가들의 문제의식을 짧고 간결하게 펼쳐낸 이번 연작은 작가의 지명도와 함께 그것을 무대화해내는 연출가의 면모도 몹시 화려하다. 국립극단 예술감독인 손진책 연출을 비롯, 최근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 연출가 박근형, 거기에 뮤지컬 연출에 전념하다 오랜만에 연극연출을 선보이는 윤호진 연출까지 합세하였다. 참여한 작가와 연출가의 면면을 놓고 보면 이번 단막극 연작은 연극계의 스타워즈, 별들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지속적으로 장막극 공연을 해 온 중견 작가들이 단막극을 통해 어떤 문제제기를 하는지, 노련하기 그지없는 연출가들은 어떤 모습으로 그것을 형상화하는지에 대한 기대를 최대화하는 화려한 조합이다.

이제 관객은 국립극단이라는 든든한 테이블 위에, 명망있는 작가와 연출가가 만들어낸 화려한 성찬을 즐기는 일만 남은 셈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 떡벌어지게 차려놓은 음식들이 보기와는 달리 그다지 맛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아마도 너무 화려한 외양에 매혹되어 한껏 기대치를 높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요리에 사용된 재료 자체가 신선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작품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근사했지만 그다지 맛있지 않았던 성찬을 되새김해보도록 한다.

 

 

욕망 저 깊은 곳에 살고 있는 괴물 : <방문>

 

장성희 작가의 <방문>은 어린이 성추행으로 전자발찌를 찬 채 섬에 감금되어 있는 한 노인의 이야기이다. 제목의 방문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는데, 하나는 외부로 나갈 수 없는 경계 안에서의 노인을 정기적으로 찾아가 약물을 투여하는 요원의 방문이며, 다른 하나는 노인의 내면 속에 자리잡고 있는 욕망과 무의식에 대한 방문이다. 작가는 얼핏 요원들의 방문을 통해 감금된 자의 상황을 강조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감금된 노인의 심리, 그 깊은 속을 들여다보는 데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섬 밖으로 한발짝도 나갈 수 없는 노인은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는 요원들을 기다리지만 심한 풍랑으로 요원들의 방문은 늦어지게 된다. 마침내 찾아온 그들은 오늘이 약물투여의 마지막 날이며 따라서 방문 역시 더 이상 없음을 알려준다. 요원만이 유일한 방문객이었던 노인은 자신 안에 들어있는 괴물이 죽지 않았다며 약물치료가 계속되길 요구하는데, 요원은 그것을 빌미로 노인의 또다른 범죄로 의심되는 사건에 대해 고백할 것을 거래한다. 노인과 요원의 묻고 답하는 과정은 역할놀이로 진행되는데, 그 와중에 노인의 마음 속 괴물이 폭발하여 두 요원을 죽이고, 노인은 경계를 벗어나 눈부신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어린이 성추행범이라는 표면적인 범죄 외에 노인의 내면에 자리잡은 괴물은 섬에 놀러온 젊은이를 죽여 바다에 던져버리기까지 한다. 서류상으로는 일정정도 약물치료를 거쳤기에 괴물은 사라졌다고 정리되지만, 괴물을 품고 있는 노인 스스로 아직까지도 괴물은 내 속에 있다며 치료를 요구하는 것은 내면적 폭력성 혹은 욕망이라는 덩어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근원적 속성임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이를 추행하는 성적 욕망, 이제는 다시 오지 못할 젊음에 대한 질투는 긴 격리시간도, 전자발찌도, 어떠한 약물도 치유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괴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작가는 하나의 질문을 더한다. 사회적 관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치료와 감시를 받고 있는 노인을 통해 범죄자의 인권과 처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노인이 생활하고 있는 섬은 그 자체로 견고한 감옥이다.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려 하나 구획선을 넘어가는 순간 전자발찌는 경고음을 울린다. 이렇듯 세상과의 단절은 노인 스스로 더욱더 내면으로 침잠하게 되고, 외부 세계에 대한 강한 욕망과 동경을 키워나가게 된다. 두 명의 요원을 죽이고 섬 밖으로 나가려는 노인의 행동은 단절과 감금, 보호라는 환경 속에서 점점 더 몸뚱아리를 키운 욕망에서 기인한 것이다. 점점 더 지독해지고 극악해지는 성범죄와 그것을 저지른 성범죄자에 대한 사회적이며 법적인 단죄가 과연 그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괴물을 근원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인권의 문제로까지 확대되는 부분이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욕망의 괴물을 방문하여 성과 욕망, 인권의 문제까지 접근하는 이 작품은 실상 단막극이라는 짧은 분량으로 인해 그 문제의식이 치밀하게 전개되지는 않는다. 노인에게 여죄를 캐묻는 요원의 행동이 돌발적이기도 하며, 그들이 벌이는 역할놀이에서 괴물이 표면화되어 요원들이 죽는 것은 급작스럽기도 하다. 작품이 갖고 있는 이러한 빈틈은 손진책의 연출을 통해 조금씩 메워졌다. 노인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건장해 보이는 윤종구 배우의 모습은 부지불식간 솟아올라오는 괴물을 누르며 사는 인물을 형상화해내는 데에 효과적이었다. 무대 전체를 섬의 공간으로 설정하되 조명으로 구획선을 표시한 것은 섬을 커다란 감옥으로 설명해주고 있었고, 섬을 벗어나는 노인에게 쏟아지는 마지막 장면의 눈부신 조명은 그것이 어쩌면 노인의 환상일 지도 모른다는 해석의 여지를 남겨준다.

<방문>은 현실 문제를 정공법으로 그려낸 작가의 문제의식과 그것을 무대화해내는 연출의 조화가 비교적 잘 이루어진 작품이지만, 단막극으로 담아내기에는 지나치게 심오하고 거대한 주제였기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공연 내내 노인의 행동에 대한 개연성과 타당한 이유들을 찾아내는 데에 급급한 양상이었다. 이 문제의식은 그대로 유지하되 장막극으로 보다 디테일한 사건들을 다양한 층위로 구성해낸다면 흥미로운 공연이 될 것이다.

 

건달과 피자와 사자를 관통하는 꽃 : <꽃과 건달과 피자와 사자>

 

최치언 작가의 <꽃과 건달과 피자와 사자>는 제목부터 지극히 최치언스럽다. 서로 연결되기 어려운 단어들을 당혹스럽게 나열한 것은 작가의 특징인 비틀어 말하기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장 예쁘고, 가장 멋있고, 가장 맛있고, 가장 힘이 센 단어들의 조합. 징검다리처럼 뛰어다니는 플롯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들을 동원하여 현실 문제들을 교묘하게 비틀어내고 있는 최치언의 작품 경향은 이 짧은 단막극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주인공 찐따 피자맨은 출구없는 방에 갇혀 하루 종일 TV를 보고 피자를 먹는다. 그가 즐겨보는 것은 건달영화(음향으로 처리된 영화는 <올드보이>였다), 피자를 입에 가득 물고는 건달의 품새를 흉내내는 것이 그의 움직임 전부이다. 그러다 목이 막혀 혼수상태에 빠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영화 속 건달이 여자친구 꽃과 함께 피자맨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탈출을 시도하는 건달은 자신이 속한 공간의 유일한 문은 화장실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곳에서 들려오는 사자울음소리와 맞서 싸운다. 사자의 소리가 아니라 변기 물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꽃은 건달을 이해할 수 없게 되고, 피자맨은 자꾸만 피자를 먹는다. 피투성이가 된 건달이 화장실에서 나올 때 그 뒤를 따라나온 사자의 정체는 피자맨의 엄마였다.

사실, 이렇게 정리한 작품의 내용은 별로 의미가 없다. 피자맨이 좋아하는 네 단어, 꽃과 건달과 피자와 사자를 근간으로 하여 방안에 갇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젊은이의 의식과 무의식, 욕망과 허상 등이 수시로 교차하는 것이 이 작품이기 때문이다. 피자맨이 TV를 보며 하루 종일 피자를 먹는 모습은 그가 들여다보는 영화 <올드보이>와 닮았다. 몇 해 전 <올드보이>의 연극공연에 각색을 맡았던 최치언은 능청스럽게 영화를 노골적으로 패러디하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이 군만두만 먹었다면, 피자맨은 피자만 먹을 뿐이다. 갇혀 있으면서 한 가지 음식만 먹어대는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점은 피자맨은 피자를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런 그의 이상형은 건달이다. , 피자맨에게 건달은 자신이 되고 싶은 욕망의 실체인 셈이다. 하고 싶은 대로 주저없이 행동하고 힘을 쓰는 건달은 한 번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본 적이 없는 피자맨에게 엄청난 매혹이며, 더구나 갇혀 있어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피자맨의 현실과 대비했을 때 건달은 항상 많은 사람을 만나며, 심지어 꽃처럼 아름다운 여자도 항상 옆에 두고 있다. 무기력한 피자맨에게 가장 멋있는 존재인 건달. 그런데, 건달도 무언가에게 위협을 당한다.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사자의 포효. 힘겨루기가 일상이 된 건달은 어김없이 사자와 싸우러 화장실로 들어가고, 그 속에서 벌인 혈투로 건달은 만신창이가 된다. 이는 곧 가장 멋있는 존재가 가장 힘이 센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피자맨에게 가장 힘이 센 존재는 사자인 셈인데, 이 사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헝클어진 머리와 얼굴의 생채기로 격렬한 싸움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사자는 다름아닌 피자맨의 엄마였다. 이 부분에서 피자맨의 무의식과 욕망은 하나로 꿰어진다. 출구 없는 공간 속에 피자맨을 가두고 그토록 좋아하는 피자를 하루종일 먹도록 조치한 사람은 바로 엄마였다. 피자맨의 이상형인 건달이 꽃을 데리고 나타나도 결국은 가장 힘센 사자, 곧 엄마에게 패배하고 만다. 피자맨이 상상할 수 있는 욕망과 환상이 어김없이 엄마라는 절대존재에게 굴복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복잡하고 기묘하게 얽혀있는 듯한 각각의 장면들을 통해 한정된 공간 속에 갇혀있는 피자맨의 엄마에 대한 강렬한 일탈과 저항, 그리고는 절대 복종의 의식세계를 펼쳐내 보이고 있다.

가장 멋있는 존재인 건달,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대상인 꽃은 가장 힘센 존재인 사자에게 잠식당하고, 그 사자는 곧 엄마라는 절대적인 꽃으로 수렴되는 이 작품은 무기력한 찐따가 되어버린 현실의 젊은이들에 대한 초상으로 읽혀진다. 사자만큼 강렬한 힘을 가진 엄마에 의해 어른이 되어도 조정당하는 젊은이. 벗어나려고, 엄마를 죽이려고 하나 결국은 굴복하고 마는 현실. 사회적 관계 속에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무의식 속 욕망과 환상에 빠져 하루하루 일상을 영위하는 젊은이들이 바로 찐따 피자맨이다.

박근형 연출은 무의식의 흐름을 널어놓은 듯한 이 작품을 한 판의 놀이처럼 풀어냈다. 피자맨의 의식으로 들어갈 때는 문의 위치를 바꿔 공간에 더욱 집중하게 하였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젊은 엄마는 검은 옷으로 복선처리를 했다. 피자맨과 건달이 옷을 바꿔 입어 건달 자체가 피자맨의 욕망 덩어리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었으며, 무대 위 존재감이 대단한 황영희 배우를 마지막 장면에 등장시킴으로써 작품 전체의 의미를 깔끔하게 정리하였다. 교묘하게 작품을 비틀어내는 최치언 작가의 스타일이 일관성보다는 장면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박근형 연출과 만나 효과적으로 살아났다. 인과성을 버린 작품은 역시 그 논리대로, 인과성을 버린 채 연출해야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새와 인간 사이, 혹은 연극과 뮤지컬 사이 : ‘-깃털...’

 

마지막에 공연된 김수희 작가의 <-깃털의 유혹>은 앞의 두 작품에 비해 상당히 경쾌하며 매우 쉽다. 각종의 새들이 나와 날갯짓을 하며 서로 구애를 하고 있으나, 그것은 곧바로 인간의 삶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새를 통해 인간을 빗대는 방식은 알레고리로 작용하나 그 방식이 일대일 대응으로 손쉽게 처리되고 있어 작품의 문제의식을 이해하는 사람만 공감할 수 있는 알레고리의 매력이 상대적으로 반감된 부분이 있다.

원앙과 거위, 기러기는 수컷으로, 하루빨리 짝짓기를 하기 위해 각자의 둥지를 다듬기에 여념이 없다. 이때 등장한 암컷인 고니와 청둥오리는 자신의 짝을 찾기 위해 세 수컷을 비교한다. 원앙은 잘 생겼고, 거위는 튼튼한 둥지를 가지고 있으며, 기러기는 풍부한 식량을 모아놓았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청둥오리는 잘생긴 원앙과 교미를 하지만 바람기가 넘쳐나는 원앙은 뒤이어 등장한 아름다운 고니와도 짝짓기를 한다. 거위는 다양한 방법으로 고니를 유혹하여 짝짓기를 하는데, 알을 보호해 줄 둥지를 자랑하는 거위에게 고니는 더 이상 알을 낳을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실망한 거위는 알을 낳을 수 있는 다른 존재를 찾아다니는데, 바람둥이 원앙에게 불만을 품은 청둥오리와 만나 둘은 거위의 둥지로 찾아든다. 그 누구와도 교미를 하지 못한 기러기는 내년을 기약하며 혼자서 외로이 둥지를 다듬는다.

짝짓기에 집중된 새들의 관계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외모와 재산, 재력을 갖춘 남성이 여성에 대해 갖는 욕망과 그것에 달려드는 여성의 욕망이 그대로 읽혀진다. 예쁘고 아름다운 존재에 매혹을 느끼는 한편, 편안한 미래를 보장해주는 안정적 조건에 대한 현실적 끌림은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가며 이성을 만나는 인간의 이해타산적인 면모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주제가 이렇게 노골적이며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무대 위에 배우들이 깃털을 달고 새의 복장의 하고 있어도 그들은 새가 아닌 인간으로 비춰진다. 새를 통해 인간을 풍자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그 주제의식의 직접성 때문에 새는 지워진 채 인간만이 부각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윤호진 연출은 비교적 단선적인 이 작품의 플롯을 다양한 장치를 활용하여 경쾌하게 풀어내었다. 뮤지컬 <캣츠>의 고양이들처럼 몸에 밀착한 의상에 깃털 장식과 정형적인 얼굴분장으로 각각의 새들을 시각적 이미지로 만들어냈고, 그들의 유연한 움직임은 새에서 발견되는 습관들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었다. 화려한 조명의 사용은 세 마리의 수컷이 살고 있는 둥지를 구분하고, 짝짓기의 오묘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조절하였다. 또한 각각의 새가 처한 상황에 맞게 다양한 효과음과 음악을 사용하는데, 바람을 피우다 들킨 원앙은 가수 싸이의 를 부르고,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기러기의 슬픔은 TV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인 감수성의 테마곡을 사용해 표현하였다. 익숙한 가요와 테마곡은 관객들에게 친근함을 유도하기에, 이 작품은 세 편의 단막극 중에서 관객의 호응도가 가장 컸다.

상징적인 분장, 배우들의 춤, 그들이 부르는 노래와 음향, 화려한 조명. 관객들을 즐겁게 만든 이 작품의 연출에서 돋보였던 요소들은 분명 연극이라기보다는 뮤지컬의 것이었다. 오랫동안 뮤지컬 연출을 해온 윤호진 연출의 특성이 쉽고 재미난 작품과 만나 효과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굳이 연극과 뮤지컬을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결정적으로 아쉬운 점은 이 작품이 단막극으로 인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 단막극이 가지고 있는 연극적 장치와 문제의식이 심화되기보다는 노래와 춤에 섞여 희석되어 날아가 버렸다.

<-깃털의 유혹>, 희곡이 새와 인간 사이에서 새를 지운 채 인간에 경도되었다면, 공연은 연극과 뮤지컬 사이에서 뮤지컬에 더 가깝게 연출된 작품이다. 단막극이 경쾌하면 안될 이유는 전혀 없다. 이 작품의 발랄함은 앞의 두 작품이 과도하게 진지했기에 오히려 숨통을 틔어준 듯한 상쾌함도 제공한다. 그러나, 이왕 알레고리를 사용한다면 <파수꾼>처럼 깊이가 있었으면, 뮤지컬처럼 연출을 해도 그 속에 진지한 장면들이 조금은 포진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지울 수가 없다.

 

 

단막극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에 대한 기대

 

2012단막극 연작은 두 가지 층위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하나는 지속적으로 단막극을 무대화하려는 국립극단의 의지가 뚜렷하게 제시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단막극의 중요성에 대한 관계자 및 관객의 환기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단막극은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날카로운 작가의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삶의 단면을 통해 전체를 포섭하는 단막극의 특성은 복잡한 플롯 속에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장막극이 가질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다.

이번에 공연된 세 작품은 각각 인간에 내재된 욕망의 잔혹함, 비루한 현실 속 무기력한 개인의 환상과 무의식의 실체, 이해타산적인 인간 관계의 이기적 욕망에 대한 풍자를 내세우고 있다. 세 작품 모두 문제의식의 출발은 인간이며, 이들의 욕망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어떻게 얽혀들며, 어떤 방식으로 표면화되는가,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사회문제는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아무래도 21세기 대한민국은 개인의 일상과 욕망이 화두가 되기 때문에 작가들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세상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장막극과는 달리 단막극은 작가의 상상력과 문제의식이 훨씬 자유로울 수 있다. 누구나 보편적이라고 인식한 세계에 대해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침없는 발언과 무모한 상상력의 발동은 단막극의 몫일 터이다. 바로 이 지점이 잘 차려진 화려한 성찬인 단막극 연작의 세 작품이 보기보다는 맛이 없었던 이유다.

작가의 개성은 잘 드러났으나, 그것은 이미 다른 작품에서도 보아온 기존의 성질을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이었고, 연출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여 작품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에 집중되었다. 이왕이면, 단막극인만큼 작가의 이전 작품에서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상상력과 문제의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 또한 연출의 색다른 시도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면 매우 흡족한 맛의 성찬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름과 연출의 이름을 가리고 볼 때 도무지 누구의 작품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색다름과 자유분방함, 이번 단막극 연작에서 빠진 조미료는 바로 그것이다.

내년에도 큰 이변이 없다면 국립극단의 단막극 공연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작년의 단막극은 이미 알고 있는 메뉴들을 새로운 요리사에게 맡겨 퓨전의 요리를 선보였고, 올해는 새롭게 개발한 메뉴를 노련한 요리사들이 그럴듯한 요리로 완성시켰다. 내년에는 이 경험들로 밑간을 하고, 이번 공연에서 빠진 결정적인 조미료를 가미하여 화려하면서도 맛있기 그지없는 멋진 성찬을 만들어내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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