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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르 연극(창작), [테마] 부모님과 함께 관람, [테마] 연인 또는 부부, [추가분류] 초연, [추천연령] 20대, [추천연령] 30대, [추천성별] 전체
공연일자 2012-04-27(금) ~ 2012-05-13(일)
공연장소 백성희장민호 극장
공연시간 화-금 8시 / 토.일 3시(월 쉼)
관람등급 만 7세 이상
출연자 이종구,곽은태,박영숙,조정근,김수보,전형재,강학수,김미영,장재호,최승집,문호진,심완준,정준환,신유진,한강우,이원희,한상민,김성효,박우식,유승락,이희성,이정현,박혜선,안연주,주재희,이하늘,
티켓가격 30,000원
러닝타임 170분
제작 주최/제작: (재)국립극단
공연문의 1688-5966
홈페이지 http://www.ntck.or.kr
할인정보 청소년(30%,24세까지) 19세이하(10,000원-소년소녀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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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되어야 하는 역사에 대한 연극 <궁리>, <푸르른 날에>

극복되어야 하는 역사에 대한 연극 <궁리>, <푸르른 날에>

최고 관리자 / 2012-07-19 / 조회수 7148

극복되어야 하는 역사에 대한 연극

 이윤택 작·연출 <궁리>와 정경진 작·고선웅 연출의 <푸르른 날에>

 

김 향 (연극평론가)

 

1. 역사극의 동시대성

 

이윤택 신작 <궁리>(2012.4.24.~5.13.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와 고선웅 연출 <푸르른 날에>(4.21~5.20. 남산예술센터)는 각각 세종 때 과학자 장영실이라는 실존인물과 19805월 광주항쟁이라는 실화를 다룬 역사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역사극이라 한정짓기에는 관객들의 상상력과 감동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몸의 언어를 펼치는 것이 특징이다. 극적 설정과 등장인물들의 행위는 역사적인 시·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듯하지만, 무대 세트와 더불어 배우들의 움직임이 상징적이고 은유적이어서 관객들에게 색다른 관극 체험을 제공한다. <궁리>에서 재현된 장영실이 만들었던 발명품들과 <푸르른 날에>에서 반복되는 다도(茶道)와 불교적 상징들, 그리고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배우들의 움직임은 그 비일상성으로 인해 여타의 역사극에서 경험할 수 없는 극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관객들은 극적 사건이 제대로 고증된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나 비판적 관점보다는 그 시대 인물의 갈등이 동시대에 또 다른 형태로 반복되고 있고 그때 그 사건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동시대 문제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관객들이 이 두 역사극을 현재진행형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극 중 인물들이 현대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꿈을 좇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속 인물들의 꿈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멸된 것이 아니라 이 두 작품을 통해 부활되어 동시대 관객들의 공감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궁리>의 장영실이 보잘것없는 천민 출신이지만 뛰어난 과학자로 인정받으며 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고자 했던 꿈이나 <푸르른 날에>의 오민호가 현실의 부조리와 억압을 극복하고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꿈은 좌절되었지만 여전히이루어져야 할 꿈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신분질서와 군부독재는 물러간 듯하지만 동시대 관객들은 또 다른 형태의 신분질서, 즉 자본을 중심으로 한 불평등한 구조와 권력을 중심으로 한 인권 유린을 실감하면서 작품 속 주인공들의 고뇌에 공감하게 된다.

 

2. 비일상적인 몸, 오브제화 된 몸과 과장되는 몸

 

<궁리><푸르른 날에>는 역사적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과거와 현재, 꿈과 현재를 오가는 설정으로 인해 무대를 상징적으로 꾸몄다. <궁리>는 장영실이 발명한 시계인 자격루(自擊漏) 모양을 토대로 2층 가설 무대를 만들어 1층은 장영실의 감옥 공간, 2층은 세종(이원희 분) 및 대신들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푸르른 날에> 역시 2층 무대를 만들어 현재와 과거가 교차될 때 수직적 공간 활용을 보인다. 두 작품의 무대는 양분된 듯하지만 배우들은 이 두 공간을 역동적으로 오가며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또는 과장된 움직임을 보인다.

<궁리>의 경우 장영실의 왜소한 몸과 세종의 비대하고 병든 몸이 배우들의 실제 몸을 통해 가시화 되고 있으며 이외 황희(이종구 분), 이천(조정근 분), 조말생(전형재), 임효돈(김수보), 조순생(오동식), 유승락(최효남)은 신분의 구분을 드러내는 의복을 통해 갈등 관계를 외화시킨다. <궁리>에서는 주요 인물 외에 17명의 배우들이 12역을 맡거나 말, 별 등 오브제나 극적 분위기를 상징하는 움직임 이미지를 구현하는 코러스로 기능하는 것이 특징이다. <푸르른 날에>에는 연출가 고선웅 특유의 신파적인 연기법이 구사되면서 이로 인해 진지하면서도 코믹한 움직임이 연출된다. 오월광주 항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 배우들의 신파적 연기를 통해 관객들의 이완을 추구하는 것은 큰 모험일 수 있었지만, 배우들이 내면 깊숙이 광주항쟁에 대한 애도의 뜻을 간직한 채 잘 짜인 과장된 움직임을 보인 것은 사실주의와 거리를 둔 또 다른 진지한 연기법의 하나로 인식될 수 있었다. 상황에 따른 배우들의 코믹한 몸의 표현은 극단적으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관객들이 숨 쉴 수 있는 틈을 마련하여 작품에 대해 충분히 애도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작품에서는 배우들의 대사 역시 일상적인 대화체가 아닌 운문적인 형식을 구사하고 있어서 비일상적인 배우들의 움직임 및 추상적인 장면들과 조화를 이루었다.

<궁리>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왜소한 60대 노인 장영실의 몸과 그에 비해 젊지만 비대하고 병든 세종의 몸은 대조를 이룸과 동시에 배우 몸의 물질성이 강조되는 설정이었다. 장영실은 몸이 부실하여 감옥에서 행해지는 폭력에 쉽게 피를 흘리며 쓰러졌으며 세종은 거대한 몸에 10년간 앓고 있는 눈병과 등창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세종 의상에서 인상적인 것은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모자인데, 그의 짓무른 두 눈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영실의 늙고 왜소한 몸은 그의 과학자적 능력, 지식인의 허약함을 표현하는 듯했고 세종의 비대하지만 병든 몸은 조선의 왕이라는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고뇌와 고통을 표현하는 듯했다. 이 두 배역은 사실의 고증적인 측면이 강했다면, 안효(수레), 종이말 여섯 마리, 별자리, 발명품의 이미지를 몸으로 표현하는 코러스들의 사물화된 몸은 은유와 상징성이 넘치는 것이었다.

첫장면에서 번개, 벼락의 음향과 함께 무대에 등장하는 흰옷 차림의 흰 분장을 한 배우들은 광대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코러스로, 무릎을 꿇고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일정한 리듬으로 팔과 다리가 쓰러질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이들은 바퀴가 빠지기 직전의 안효의 불안한 상황을 몸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안효의 바퀴가 빠져 부서지는 것은 2층 무대 자체가 기울어 배우들이 1층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으로 형상화했다. 이외에도 장영실이 매를 맞아 몸에 상처가 나는 것을 코러스들이 붉은 조명을 받으면서 2층에서 1층으로 이어진 통로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마치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듯한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었다. 장영실의 몸에 나는 상처를 코러스들의 몸으로 은유적으로 형상화 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 코러스들은 여섯 마리의 말로 형상화되어 장영실의 꿈 속에 등장하기도 했고 여성 코러스들은 하늘 위의 별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이외에 코러스들은 장영실이 감옥 안에서 발명품을 모사할 때마다 발명품이 작동되는 것을 몸으로 이미지화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푸르른 날에>의 배우들은 다소 과장된 신파적 움직임을 보이는데, 내적인 상황을 대사로 표현할 때 그 과장의 정도가 커져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했다. 특히 아이’(홍의준 분) 역할은 사건 진행에 필요한 소품을 무대 안에 전달해 주는 무대 스텝으로 등장하면서 극중 역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위트와 유머 넘치는 극행동으로 관객들에게 예상하지 못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아이는 일부 장면에서만 등장하며 오월광주의 처참했던 상황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대부분의 장면에서는 주요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진지하면서도 집단적인 연기 방식을 보였다. 총에 맞거나 고문 당하는 장면 등에서는 사실적인 움직임이 연출되는데 무대 위에 핏빛 조명이 비치며 극도의 긴장감을 유발했다. 극도의 긴장감은 코러스들이 치는 북 소리로도 형상화되었다. 관객들은 북치는 소리를 따라 더욱 긴장감이 고조되었다는 후기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 개처럼 목에 사슬이 묶인 채 끌려 다니며 물고문을 당하는 오민호(이명행 분)의 몸은 과장된 듯하면서도 개연성 있는 설정으로 인식되었고 이로 인해 관객들에게 큰 진폭의 슬픔, 분노,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상처받은 몸은 단지 오민호 개인의 신체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 폭력에 희생된 이름 없는 다수의 시민들의 신체로 보이는 것이다.

이외에 <푸르른 날에>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움직임은 김남주의 시 학살 2’ 등이 집단적인 움직임으로 낭독되고 도청 안에서 ‘Another brick in the world’라는 핑크플로이드의 노래에 맞추어 뮤직비디오처럼 군무가 연출되는 장면에서일 것이다. 이 장면들은 자칫하면 지루할 수도, 유치해질 수도 있는 설정이었지만 역으로 관객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면서 오월 광주의 가슴 아픈 현실을 체험하게 했다. 배우들의 몸은 개인이 아닌 광주의 고통 받는 시민 집단의 몸이었으며 그 몸은 무대 위에서 일체화되어 움직이는 사물처럼 인식되고 관객들은 그 몸을 통해 그날의 긴장감과 위급함과 처절한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배우들의 비일상적으로 과장된 움직임은 일상적인 움직임보다 극적 정서를 더 확장하는 효과가 있었으며 관객들의 정서적 체험을 넓고 깊게 하는 것이었다.

 

3. 사라진 꿈 또는 짓밟힌 꿈

 

이천 니가 널 가두었구나.

장영실 세상이 날 가둔 것이 아니고요?

 

<궁리>의 장영실이 임금의 총애를 받다가 수레가 부서지는 사건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면서 주군은 왜 내게 수레를 만들라고 하셨습니까?”라는 원망을 토로할 때 꿈 속에 나타난 이천이 장영실에게 건네는 말이다. 장영실은 자신이 왜 하찮은 수레를 만들다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는지 한탄했고, 이에 대해 노 장군이자 스승인 이천은 세종을 등에 업고 위로 오르려만 하고 낮아지지 못하는 그의 마음을 꾸짖는다. 대의명분에 저항하는 큰 뜻을 품었다기보다는 세종을 등에 업고 자유롭게 발명품을 만들고자 했던 장영실의 욕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장영실은 세종을 따르며 그의 꿈, 즉 명나라로부터의 자주독립 실현에 도움이 되는 발명품을 만들지만 정작 그는 대의보다는 과학자로서의 자아실현이라는 욕망을 추구하며 그 욕망 때문에 고뇌했었다. 그러나 장영실의 무의식은 스승 이천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자아 성찰에 이르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장영실은 과학자로서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출신이 천민이라는 이유로 처벌을 받게 되는데, 채벌을 받고 나오며 북극성을 보는 순간 세종에 기대어 꿈을 실현하려던 기생적인 자아를 탈피하여 자기의 별을 찾겠다는 주체적인 인식을 하게 된다.

일정 칼을 버리랬더니, 꿈마저 버렸더냐?

 

<푸르른 날에>의 오민호는 오월광주 항쟁 때 도청에 있었다는 죄목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속세와 인연을 끊은 채 불가에 귀의한다. 그는 30년이 넘도록 승려 여산(김학선 분)으로 살았지만 자신이 버린 사랑했던 여인 윤정혜(정재은, 조윤미 분)와 딸 오운화(최광희 분)에 대한 그리움으로 깊은 번뇌에 빠진다. 인용문은 윤정혜와 오운화에 대한 죄의식으로 오히려 이들을 거부하는 여산의 무의식 속에 나타난 스승 일정(이영석 분)이 매몰차게 던진 말이다. 국가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던 오민호는 자신의 공포와 분노가 폭력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것을 다스리고자 했지만 그 과정에서 내면의 소중한 꿈을 억누르고 있었고 이에 대해 일정 스님은 혜안의 깨달음을 준 것이다. 고통과 번민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으려 했던 오민호에게 일정 스님은 마음의 흐름을 따르라는 깨달음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관객들은 장영실과 오민호의 사라지고 짓밟힌 꿈을 보면서 현대인들 역시 동일한 고통과 번민을 겪고 있다는 동질감을 경험하게 된다. 즉 이들의 꿈을 당시대에 실현되지 못한 좌절된 꿈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는 이루어야 할 꿈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관객들이 꿈을 이루기 위한 대립과 갈등을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듯하다.

4. 극복되는 역사를 향하여

 

장영실이 안효를 잘못 만들었다는 이유로 끝내 궁궐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그가 천민 출신으로 명나라를 능가하는 발명품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신분질서와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조선의 대신들에게 장영실은 가히 위협적인 낯선 타자였다. 대신들은 장영실이 신분질서를 흩뜨리고 명나라의 심기를 건드려 조선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는 우려를 한 것이다. 장영실의 시간을 지배하는 능력은 명나라에게는 가히 위협적인 것이었고 천민출신이 해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장영실은 세종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로, 당시 세종의 자주적 의식과 대립하고 있던 대신들은 장영실을 곱게 보고 있지 않았다. 안효가 부서진 사건은 대신들에게 장영실을 궁궐에서 쫓아낼 절호의 기회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채벌 후 피투성이가 된 장영실은 자신의 발명품이 왕세자 이름으로 적혀 있다는 것에 절망함과 동시에 북극성을 발견하고 그 별을 따라 북쪽산을 오른다. 무대에는 조명으로 아름다운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펼쳐지고 관객들이 그 빛나는 별들을 보는 동안 장영실은 자신만의 별인 북극성을 따라 산을 오른다. 저 멀리 있던 북극성을 세종의 머리 위 조선으로 옮겨 놓겠다던 장영실은 천상열차분야지도를 통해 북극성을 옮겨 놓고 그 자신이 별이 된 듯하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 세종의 환상 속에 나타난 장영실은 세종을 거부하며 그 별을 자신의 것이라 이야기한다. 소외된 타자였던 장영실은 신분제도와 권력 갈등 속에서 그 꿈을 실현할 수 없었지만 세종은 환상을 통해 장영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푸르른 날에>의 배경인 19805월 광주항쟁은 군부독재에 의해 자행된 국가 폭력이었으며 평범한 대학생이던 오민호에게는 자신이 가르치던 야학학생들과 사랑하는 여인 윤정혜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룸메이트였던 윤기준(조영규 분)을 앗아간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오민호는 역사의 희생자가 되어 일상을 잃고 사랑하는 윤정혜와 딸 운화(최광희 분)를 버렸다. 그런데 작가 정경진은 이들의 딸 오운화의 결혼식을 통해 슬픔으로 얼룩진 살아남은 자들의 화해를 도모한다. 오운화의 결혼식은 오월항쟁 그리고 앞서 삶을 마감한 이들을 무대 위로 불러들인 한판의 축제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이 축제는 상처받은 젊은 오민호와 여산, 젊은 윤정혜와 동시대 정혜의 화해의 장이기도 했다. 현재의 여산과 정혜는 푸르른 날의 자신들을 끌어안으면서 자신들을 위로하고 상처를 회복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들의 푸르른 날은 크나큰 폭력과 상처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긴 이별을 해야만 했던 시절이지만 일정 스님의 가르침처럼 넘어졌으니 넘어진 곳에서 다시 서!”야만 하는 역사의 현장으로서의 푸르른 날들이었고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현재의 푸르른 날들이라 할 수 있다.

<궁리><푸르른 날에>는 외적 억압에 의해 자신의 꿈과 사랑을 펼치지 못하고 삶에서 좌절될 수밖에 없었던, 자기 삶에 충실하고자 했으나 배제되고 사라져야만 했던 이들을 애도하는 작품인 듯하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가 철폐되었고 민주주의가 실현된 듯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삶에서 배제되고 고통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사라져가는 이들이 많지 않은가.  

역사를 재현하는 과잉의 몸짓, 연극 궁리

역사를 재현하는 과잉의 몸짓, 연극 궁리

최고 관리자 / 2012-06-14 / 조회수 8948

역사를 재현하는 과잉의 몸짓

 

 

양근애(서울대 강사)

 

 

공연명: <궁리>

작,연출: 이윤택

공연일시: 2012. 4. 24. ~ 5. 13.

공연장소: 백성희장민호 극장

관극일시: 2012. 5. 8.

 

 

과연 역사극의 붐이라고 할 만하다. 극장에서나 안방에서나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관객/시청자들에게 속속 도착하고 있다.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고 특히 최근의 역사극은 역사적 사건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에 직면한 인간을 그린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게다가 사회적 정치적 사건이 돌출되는 시기에 역사극이 많이 생산, 소비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역사를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극이 다루고 있는 사실(史實)은 언제나 알레고리로서 사실 너머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윤택의 <궁리> 역시 사실을 다루되, 기록된 사실이 미처 보여주지 못한 ‘가능성으로서의 역사’를 가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작품은 세종실록에 실린 한 구절,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에서 실마리를 얻어 역사를 재구성한 역사극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 즉 왕조사나 정치경제사 중심의 대문자 역사에서 문화사, 미시사, 일상사 등 ‘작은 역사들’로의 이행을 보여줌과 동시에 기록된 역사에 대한 ‘두터운 묘사(thick description)’를 시도한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역사 교육에 의해) 알고 있는 세종조와 장영실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는 <궁리>에 와서 두터운 입체감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궁리>는 이 작품을 만든 이윤택 자신이 “서울 중심과 지역 자치, 인문학적 권력과 과학적 전문성, 중국 중심 동북아 정세 속에서의 한반도 등 다양한 화두가 녹아든 부산 문화 콘텐츠”라고 말할 정도로 ‘장영실 스토리텔링’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이 작품은 국제신문에 ‘연극소설’로 연재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을 소설, 뮤지컬, TV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매체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장영실을 역사 기록의 한 줄에서 욕망을 가진, 울고 웃는 한 인간으로 되살려낸 것은 이 연극의 가장 큰 미덕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역사극이란 역사서사와는 달리 무대라는 공간에서 가시화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물론 이때의 가시화란 무대 장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관객들은 무대 위의 장치뿐만 아니라 조명, 음악, 음향, 배우의 연기, 그리고 플롯을 감각적으로 느끼는 연극의 완성자이기 때문이다.

장영실이 자신을 단지 기술자가 아니라 과학자로 인식하는 순간, 그리고 세종이 그를 총애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순간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지배 논리를 역설하는 대신들과 그런 정치에 희생된 천민들의 소박한 욕망의 충돌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역사를 살아가는 인간의 고뇌를 무대 위에 형상화하는 것이 연극의 질문이자 대답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정교하고 논리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궁리>가 역사와 그 역사를 살아낸 한 인간을 다루는 데 있어서 일정한 장점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대화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편함이 남는다. 이 연극은 왜 장영실을, 세종을, 황희를, 임효돈을, 그리고 이름 없이 살아간 역사의 수많은 인물들을 극 속에서 그들대로 살아가게 하지 않는가. 바꿔 말하면 이 극이 역사를 대하는 논리가 인물을 장악해버려 역사에 대한 또다른 해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아마도 이윤택 연극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놀이성’-‘대중성’을 극의 육체로 녹여내는 방식 때문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이 방식은 관객을 스스로 들썩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몽시키려고 한다.


이윤택의 무대는 언제나 꽉 차 있다.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뜻은 아니다. 인물의 수와 상관없이 이윤택의 배우들은 대사와 심지어 행동조차 설명적이다. 장영실이 잠 속에서조차 주군에 대한 충심과 천문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으로 괴로워하는 꿈을 꿀 때, (에쿠스를 저절로 연상시키는) 흰 말들이 나오는 장면은 장영실의 고뇌를 드러낸다기 보다는 그것을 장식한다. 장영실이 함께 투옥된 사람들에게 자신이 고안한 측우기와 해시계, 자격루를 만드는 장면 역시 그가 얼마나 자신의 기술을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한 과도한 설명으로 보일 뿐이다. 게다가 극의 마지막에 연이어 몇 번이나 다른 방식으로 별자리를 보여주는 장면은 여백을 생략해버린 과잉의 장치로 보인다. 이 대목에서 장영실의 고뇌는 역사를 관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정서적인 것으로 봉합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장면들이 다 과잉이라는 뜻은 아니다. 첫 장면은 이 극의 주제를 함축할 만큼 강렬하고 상하로 나뉘어진 무대와 전체적인 톤은 이 극이 지향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출가 스스로 말한 ‘거리두기’ 연기의 방식이나 인물이 가지고 있는 내적 욕구와 모순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오히려 적절히 비어있어야 했던 것은 아닌가. 사실 가장 의아한 대목은 사실적이지 않은 양식을 지향하는 이 극이 고문 장면을 재현하는 자극적인 방식, 그리고 돌연 제 4의 벽을 깨뜨려 광대패들이 관객에게 떡을 나누어주고, 영실의 딸이 무대와 객석 경계에 서서 욕지거리를 뱉는 그런 장면들이다. 이 장면들은 관객들이 느끼고 생각할 여유를 빼앗는다. 무대와 관객 사이의 대화가 필요하다면 이렇게 일방적인 방식이어서는 안된다. 잘 만들었다고 해서 그 의도가 좋다고 해서 받아들이는 쪽이 무조건 그것을 용인하고 흡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연극이 관객에게 역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 그 방식의 우둘투둘함이 못내 아쉽다. 여백이 많았다면 관객들은 연극이 끝난 뒤에도 장영실을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상상’으로 출발한 이 극이 추구하는 ‘진실에 대한 짐작’은 극장이라는 공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뛰어난 작품은 언제나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양식을 넘어선다고 믿는다. 지금 우리의 극은 기실 사실주의극도, 서사극도, 부조리극도 제대로 성취하지 ‘않는다.’ 우리의 전통과 관습과 공통감각으로는 이러한 양식을 언제나 비껴가면서 ‘다르게’ 재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서둘러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서구에서부터 온 극 양식에 도달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우리 연극의 독특한 미학을 성찰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극이란 언제나 무대와 객석 ‘사이’를 의식해야 할 것이다. 그 사이를 좁히느냐 넓히느냐 혹은 그 사이에서 자유롭게 놀 것이냐는 연출가의 미학적 판단과 연극적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관객은 언제나 폭이 크고 넓은 기대지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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