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해석과 배우의 존재론 <전하의 봄>
최고 관리자 / 2012-07-19 / 조회수 7778
역사의
해석과 배우의 존재론
양근애
공연명
:
<전하의
봄>
원작
:
신명순,
<전하>
극작
:
이해성
연출
:
김승철
출연
:
이경성,
김학수,
김성일,
이형주,
강진휘,
박상석,
서삼석,
김민태,
박시내,
김관장,
이진복
제작
:
창작공동체
아르케
공연기간
:
2012. 4. 20. ~ 2012. 4. 26.
공연장소
: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2012년,
바야흐로
역사극의 붐이라고 할 만큼 극장에서나 TV에서나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앞 다투어 등장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나
군사독재기 등 정치적 격변기에 역사극이 득세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정권 교체기에 만들어진 역사극은 그 정치적 해석까지 더해져
분분하다.
더구나 올해
등장한 역사극들은 역사가 드라마라는 외장을 취할 때 사실(史實)과 허구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는지를 극단을 오가며 보여주고 있다.
기록된 역사
중에서 여전히 논란거리가 되는 굵직한 사건을 다룬 드라마부터 배경만 역사에서 취한 판타지 역사극까지 현재가 과거를 여러 방식으로 통과하며
재현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묻는다.
드라마는 왜
역사를 선택하는가.
나아가 이
질문은 이렇게 옮아가기도 한다.
현재는 어떤
역사적 드라마에 읽히는가.
지난
해,
국립극단
단막극 연작 ‘새판에서 다시
놀다’에 선을 보인
후,
대극장 무대로
옮겨온 <전하의 봄>은 이 질문에 대해
연극으로서,
배우로서
답하는 연극이다.
서둘러 나온
이 대답이 어딘가 비어있다고 느낀다면 당연하다.
연극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현실에 대해 답하고 있고 배우는 그 자신으로만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계속되는 역사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괄호 친
역사,
그림자에 대한
상상
막이 오르면
커다란 화폭에 붓으로 휘갈겨 쓴 배경 위로 달이 떠 있고 세조는 이 배경 막과 관객 사이 텅 빈 무대 위에 홀로 서서 칼을 매만지고
있다.
이 비어있는
무대는 역사를 다루는 <전하의 봄>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세조는 왕이되
왕좌에 앉아 국사를 논하거나 정책을 다루는 대신 홀로 서서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위험에 노출 된 채 불안과 대면하고 있다.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신숙주가 등장한 뒤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 우리가 익숙하게 상상하는 조선시대 왕의 모습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조의
왕위찬탈이라는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계유정난 이후의 수양과 신숙주의 내면,
그 보이지
않는 그 속내를 드러내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이
재현하는 극중극은 우리에게 익숙한 기록된 역사가 아니라 그 이면에서 일어났을 법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전하의 봄>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그림자’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기록된
역사뿐만 아니라 (공유)기억을 만들어내는 사실까지 역사에
포함시킬 수 있다면,
<전하의
봄>은 포스트모던역사학의 관점으로 읽어낼
수 있는 드라마가 된다.
굳이
포스트모던역사학이 지향하는 ‘두꺼운 묘사’나 ‘다르게 읽기’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단종이나
성삼문이 아닌 수양과 신숙주의 편에서 세조의 왕위찬탈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연극의 원작인 신명순의 <전하>에서 이미 시도된 것이기 때문에 그
소재적 특이성을 <전하의 봄>에서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오히려
<전하>가 학자와 학생들 사이의 진지한
토론을 통해 역사의 이면을 재구할 때,
<전하의
봄>이 관객의 머릿속이 아니라 무대 위에
많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것을 통해 상상하게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무사가
커다란 부채를 들고 세조를 호위할 때,
세조가 칼을
휘둘러 사육신을 죽일 때,
그리고 윤씨가
스스로 목을 매 죽을 때 무대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림자는
불투명한 물체가 빛을 가릴 때 생겨나,
그 스스로
제대로 된 형체를 드러낼 수 없는 운명을 지녔다.
그렇게 대의와
명분,
명예와 실리
사이에 가려진 역사의 그림자,
그 괄호쳐진
‘가능성으로서의
역사’를 시각화한다는 것이 이 연극의
특징이다.
그림자를 통해
보여준다는 것은 구체적인 형태가 아니라 모호하고 우회적인 형식을 통해 또 다른 해석과 상상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극이 빈
무대를 필요로 한다면 바로 그러한 재현의 윤리 때문이 아닐까.
역사를
가시화할 때,
연극은
필연적으로 무대에 일부만 보여줄 수밖에 없다.
역사‘소설’이 아니라 역사‘극’의 고민은 여기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신숙주의
부인 윤씨의 죽음이 역사적 기록과 달리 남편의 불명예스러운 선택에 대한 자결로 처리된 것은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에서 온 것이지만 그러한 사건을
극적인 형식으로 가져올 때에는 그 장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문제시 된다.
<전하의
봄>은 그림자로,
빈
무대로,
빈 무대를 꽉
채우는 북소리로,
여백으로
그리고 극중극이라는 형식으로 가려진 역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정사(正史)와 정도(正道)
사이
첫 장면에
등장한 세조와 신숙주 그리고 연이어 등장하는 인물들은 조선시대 복식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상태다.
그들은 충실히
역사를 재현하는 관습적인 극 속의 배우들이 아니라 극중극을 연습하는 극 중 현실의 배우들이기 때문이다.
<전하의
봄>은 서사극의 형식을 취한
<전하>와는 달리 극중극이라는 메타연극의
형식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다소 장황한 원작의 토론 내용을 경쾌하고 솔직한 대화로 풀어갈 수 있게 한다.
신숙주 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중요한 대목에서 연습을 끊고 도저히 신숙주를 이해할 수 없다고 연출에게 항변하는 장면이나 배우들 간의 미묘한 신경전과 선후배
배우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 이 넘나듦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기록된
역사에서 폭군으로 묘사된 세조나 변절자로 낙인찍힌 신숙주의 이야기를 그들의 편에서 다루게 될 때,
그 위험
부담이 약화될 수 있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신숙주의
인간적 고뇌를 다루게 되면 그들의 살인이 정당화되지 않겠냐는 배우의 물음은 외려 순진한 편에 속한다 할 만큼 명예가 아니라 생존이 중요하다는
신숙주의 대사나 낡아빠진 조정을 쇄신한 자신의 행위는 결국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는 세조의 대사들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배우들이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역사를 해석한다는 상황 설정은 과연 정사(正史)가 정도(正道)를 담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져주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결과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역사(正史)를 학습하지만 경험적으로 인생의 바른
길(正道)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다분히 연출
의도가 짐작되는 이러한 방식은 기실 관객을 넘어서 극장 밖의 현실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세조가 아무리
호가호위하는 늙은 대신들을 경계한 것이라고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한들,
신숙주가
아무리 고통스러워하며 벗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밖에 없는 상황을 항변한들 역사적 사실과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삼문과 세조의 논쟁에서 또 신숙주와 윤씨의 대화에서 어떠한 선택이 옳은 것인지,
그 선택의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권력이 사실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지 정치가 인간을 얼마나 비루하게 만드는지 지켜보면서 우리는 그들의 고뇌와 선택을 통해 그 사실(史實)
너머를 사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사(正史)
역시 사관에
의한 기록일 뿐이라는 해체의 과정이 이 메타연극의 출발지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극중극을
연출하는 연출가는 연습 도중 불쑥불쑥 끼어드는 전화와 극장직원의 방문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상태다.
공연을 일주일
앞두고 연극을 부드럽게 고치라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한 그는 이 공연을 끝으로 상임 연출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사실을 배우들에게
알린다.
극중극의
명예와 생존을 둘러싼 문제는 그것으로 끝난 역사가 아니라 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반복되는 권력과
정치의 문제로 전이되는 것이다.
결국 배우들은
각자의 계급적 위치와 정치 감각의 차이로 인해 갈등한다.
연출 역시
자신의 신념과 관의 이념 사이에서 고뇌한다.
그들이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하더라도 고통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선택이 바른 길이라는 믿음에 의지할 뿐이다.
또 어떠한
선택이 역사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역사는
씌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가 난
배우가 객석을 향해 욕을 내뱉고,
배우들이
공연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연습에 들어갔을 때,
그 장면이
끝나도록 연출이 두들겨 내는 북소리는 멈추지 않고 온 무대와 극장을 하염없이 울린다.
배우들은 멈춰
서서 그런 연출을 쳐다본다.
그 정지된
시간이 주는 연극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지나온 역사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무엇을 어떻게 체현하고 있는 것인가.
극 중
현실을 사는 배우,
그 실존의
문제
역사극의
진행과 연극 연습의 진행이 <전하의 봄>의 시간적인 축을 담당하고 있다면 그
사이를 공간적으로 채워나가는 것은 다름 아닌 배우의 육체이다.
세조 역을
맡은 배우는 세조의 대사와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를 연결시키고 싶어 하고 신숙주 역을 맡은 배우는 자신의 부채감을 연기에 투사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윤씨 역할을
하는 배우는 오히려 신숙주의 인간적 고뇌가 이해가 간다고 말하고 신숙주의 아들 역을 대신한 조연출은 그저 아버지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들은 온전히
배우인 자신으로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맡은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서 다른 인물들을 이해하는 자신들을 발견한다.
중요한
대목에서 극중극의 틈이 벌어지고 극 중 현실로 돌아오는 것,
이 균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이제 앞의 질문에 대해 다시 답해보자.
극 중 하인
역을 맡은 배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니까,
세조라는
이름은 존재하지만 실체는 배우인 네가 무대 위에 있는 거고,
너 역시도
이름은 있지만 그 이름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거고,
너의 실체는
그 이름이 아니라 너의 그 존재라는 거지.
근데 그
너라는 존재도 길게 바라보면 결국 없다는 거야.
숙주 쟤가
저렇게 연출한테 따지고 들지만 쟤도 무대 위에서만 존재하지 이 연극이 끝나고 나면 사라지잖아.
관계가 끝나면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이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편 가르고 싸움만 하게 되고.
연기처럼 모든
게 관계라고 생각하면 작품을 위해 상생하게 되겠지.
인생은
연극이니까.”
배우는
등장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그 인물을 가장 가까이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인물에 대해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기록된
역사를 읽는 대신,
역사극을 통해
역사에 대해 사유하는 이유는 역사 속의 개인을 잘 그려내는 것이 그 시대를 잘 그려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가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역사적 사건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 시대를 해석하는 첫 번째 과정이다.
그 과정
자체를 보여준다는 것,
그 속에서
고민하는 배우의 태도가 바로 배우의 존재론이 아닐까.
역사극은
역사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진실이 인간과 인간의 삶 속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역사가가
아니라 작가가 그려내는 역사적 사실은 그래서 다채롭고 극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하의 봄>은 역사를 해석하는 배우들의 연습
과정을 통해서 역사는 물론,
배우라는
존재의 실존적인 문제와 윤리적인 선택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 같다.
역사가
드라마가 될 때,
사실(史實)이 보다 더 진실된 허구를 만날
때,
그 극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서 배우들은 극 중 현실을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배우는 연극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
나아가 역사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실존하는지 역사극은 그 오래된 질문을 또 다시 하고 있는 것이다.
연극이 마무리
될 때 쯤,
또 다른
연출가가 나타나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또 하나의 연극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킬 때 그 겹겹의 현실 속에서 역사는 흐른다는 듯 연극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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