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시절, 착한사람 - 연극 <그 여자의 소설>
최고 관리자 / 2012-04-12 / 조회수 3884
착한시절, 착한사람 - 연극 <그 여자의 소설>
오주희 (극작가)
공연기간 : 2011년 11월 2일 ~ 11월 27일
관 람 일 : 11월 26일
작 : 엄인희
연출 : 강영걸
장소 :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
<그여자의 소설>은 작은할머니가 시집가는 손녀의 치마저고리를 지어주면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작은할머니의 이야기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과거 우리 시대의 한많은 역사와 아픔, 한국 여성들의 고단한 삶을 잔잔하지만 감동있게 보여주고 있다.
작은 할머니로 불리는 여자, 여자는 열여섯에 시집을 가 딸을 하나 낳고 살지만 남편이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난 뒤 소식이 없자 집안을 보살피기 위해 쌀 한가마니를 받고 김씨댁 씨받이로 들어간다.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와 우물가로 여자를 찾아오지만 김씨의 둘째아기를 임신한 여자는 전남편에게 물 한 바가지 떠주는 것 밖에 할 수가 없다.
김씨와 큰댁이 애타게 기다리던 아들을 3년만에 낳은 여자는 해방이 되고 6.25전쟁이 터지고 난 뒤에도 여러 사정으로 자신의 남편과 어린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전쟁통에 큰댁이 죽지만 자신이 낳은 아들 진범에게 여전히 작은 어머니라 불리는 여자. 둘째아들을 낳고도 호적조차 옮기지 못한채 김씨를 받들며 살아가는 여자. 자신의 친모가 여자임을 알고 괴로워하는 진범에게 여자는 “내가 이 집으로 팔자를 고쳐서 온건, 너를 낳아서 괴롭힐려고 그랬던건 아냐. 그 당시 여자들한테는 길이 없었어”라며 그 누구에게도 원망조차 하지 않는다. 여자의 딸이 어느새 시집을 간다며 자신을 찾아와 절을 올리지만 떳떳치 못한 어미이기에 딸 앞에서도 가슴을 짓이기며 조용히 눈물을 참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기구한 일생을 살았던 여자는 이제 할머니가 되어 곧 시집가는 손녀에게 자신과 같은 삶을 되풀이 하지 않기를 덤덤한 표정으로 당부한다. 자신처럼 남편이 몽둥이를 들때마다 무조건 수그러들거나 대청마루밑으로 기어들어가지 말고 차근차근 따져보라고, 그리고 역시 마찬가지로 남편을 마루밑으로 몰아넣지 말라고.
여자가 살았던 시절은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불리한 시절이었다. 가부장적 사고와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했던 봉건시대에 참고 인내하며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던 여자들은 비단 작은 할머니뿐 아니라 그 당시 많은 여자들에게 한과 설움을 삶의 깊은 곳에 숨기며 살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 여자의 소설>을 단순히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우리 시대의 인간적 감수성으로 다가간다면 우리시대의 어머니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대를 잇기 위해 스스로 작은댁을 들인 큰댁은 여자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며 노심초사 아들낳기를 기대한다. 여자가 낳은 아들을 자신이 낳은 아들처럼 돌보며 여자가 먹고 살 밑천을 마련해주기 위해 애쓰는 큰댁의 모습은 참고 인내할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큰댁이 죽자 자신의 피붙이를 잃은듯 괴로워하는 여자의 눈물은 우리 모두의 가족관계를 다시 한번 뒤돌아 보게 만든다.
독립운동을 위해 가족을 버려야 했던 여자의 본남편은 여자를 다시 데려가려 하지만 남의 자식을 낳고 또 다시 임신까지 하고 있는 여자를 보고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다. 여자에게 식구의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꼭 갚겠다고 약속하며 ‘착한사람!’ 이라고 탄식하듯 작별인사를 건네는 본남편의 뒷모습에는 파란만장한 우리시대의 뒷모습을 읽을 수 있다. 포악하고 가부장적인 김씨 역시 자신의 본부인과 둘째부인인 여자를 노예부리듯 부리지만 늙어 치매를 앓으면서 김씨에게 아들을 낳아줘서 고맙다는 속내를 드러내는 모습에서 아들을 선호하던 시대의 또 다른 희생자일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그 여자의 소설>은 故엄인희 작가의 원제<작은할머니>로 여성주의의 날카로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안고 있는 작가의 대표작이다. 하지만 단순히 여성문제로 접근할 수도 있는 작품이 <그 여자의 소설>로 제목이 바뀌면서 강영걸 연출의 애정어린 시선을 통해 한 여인의 삶을 통해 뻔할 수도 있는 우리의 근, 현대사를 새로운 시대의 감동적인 이야기로 바뀌었다. <그 여자의 소설은> 고단한 역사와 함께 견뎌왔던 나약하지만 강했던 착한시절, 착한사람의 사연이라 할 수 있다.
<그 여자의 소설>에서 작은 할머니의 아픈 과거는 손녀와의 대화에서 회상형식으로 펼쳐지지만 단순한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누군가의 부인이 되고 어머니가 될 손녀에게 들려주는 새로운 희망의 이야기이다.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과거의 슬픈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착한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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