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조리원 이야기
최고 관리자 / 2012-04-26 / 조회수 6501
산후조리원 이야기
극작: 공동창작
연출: 김철승
상연일시: 2012.02.09.~2012.02.19.
상연장소: 설치극장 정미소
관극일시 : 2012.02.17.
구현경(건국대 박사과정)
분석하는 자의 시선은 관객들과의 시선과는 달라야 하고, 다를 수밖에 없다. 주변 관객들의 호응도가 높았고 즐거워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이와는 다른 시각에서 공연평을 쓰려한다.
‘참젖산후조리원’이라는 세상 위에 다양한 인물 군상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펼쳐보인다. 5대 독자를 출산한 장기숙의 시부모는 고사를 지내러 찾아오고, 다이어트 강박증에 걸린 철부지, 여섯 번째 아이를 출산한 다산녀, 말 많은 청소원 백여사, 그리고 다문화녀, 미혼모까지. 시끌벅적하고 화기애애한 산후조리원에 정체모를 궁금녀가 찾아든다. 아이도 없이 산후조리원에 기거하는 그녀는 늘 아기들을 바라보며 한 많은 사연을 감추고 있는 듯 하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고 회피의 대상이 된다. 궁금녀는 미혼모의 아이를 안고 사라진다. 아이를 잃어버린 미혼모는 실신직전에 이르고 산후조리원은 발칵 뒤집힌다. 궁금녀의 남편은 부인과 아이를 안고 산후조리원에 찾아와 미혼모에게 사과한다. 결혼 전 아이를 낙태하고 자궁적출 수술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궁금녀는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 우를 범한 것이다. 여자들은 궁금녀를 측은하게 여기고 산후조리원은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젖는다.
모든 이를 만족시키는 연극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많은 관객을 확보해야 하는 것은 대중예술의 태생적 숙명이다. ‘산후조리원 이야기’는 ‘엄마’라는 이름을 지닌, 지니게 될 여성들의 보편적 공감대를 겨냥하고 있다. 관객석은 아이를 출산한 경험이 있는 40대 중반의 여성관객들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김철승 연출은 모성애나, 생명의 소중함이 아니라. 딱 죽고만 싶은 산고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내보낸 체험을 한 여자들만의 긍지, 보람 , 애환을 이야기하며 ‘엄마’라는 존재가 주인공인 연극이라고 말하고 있다. 필자의 관극 소감에 의하면 저출산의 시대, 모성애와 생명의 소중함을 부각시키며 아이 좀 낳으라고 강조하는 국책홍보적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연극성이란 본래 과잉의 에너지를 함의하고 있으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사실과 현 세태를 표방하고 있는 연극에 관해서는 그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상황들의 이야기.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너무도 구태의연하고 구시대적이다.
어느 신문 한 표제에서 ‘20대는 결혼을 못하고, 30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 라며 한국 사회의 현실을 기술했다. 출산율 저하 세계 1위, 불모의 시대, 종족번식의 본능인 인간의 생물학적 욕망도 억제하고 살아야하는 시대. 결혼도, 아이도 출산해 본 적 없는 여성들의 공감대는 어떻게 포섭할 것인가.
유교적 가부장제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자식과 아들을 생산하는 도구적 기능을 하였다. 우리의 모성이데올로기는 가족주의를 기치로 삼은 근대화 기획에 의해 더욱더 강화된다. 국가의 기획은 모성신화를 개별주체들에게 내면화시켰다. ‘지금 여기’의 여성들은 천대받던 여성의 위치에 대한 보상심리에 의해 모성신화 주입에 적극 동조한다. 이는 억압받았던 약자들의 귀환으로써 그 바운더리 안에 입성하지 못하는 자에게 또 다른 권력으로 자리한다. 과거는 과거의 시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지속적으로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 사회 정체성의 기원은 근대화 기획에서 촉발된다.
아이를 낳아 봐야 진짜 여자가 된다?
아이를 배지 못하는 남자들과 아이를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여자들,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여자들에게 자신들의 특권을 언표화시키는 언술이다. (참고로 본인은 독신주의자도 아니며 평범한 엄마가 되길 소망하는 이들 중 하나다.)
자신의 뼈와 살로 잉태시켜 열 달 동안 뱃속에 품고 세상 밖으로 생명을 내놓은 진짜 여자들의 행로는 어떠한가? 눈에 보이지 않는 탯줄로 자식을 꽁꽁 묶은 채 외모만 어른인 아이로 육성시킨다. 외제 유모차를 태우고 좋은 유치원에 배정받기 위해 밤새 줄을 서서 기다리고 사립 초등학교, 어학연수를 거쳐 명문대학 진학까지. 이 바운더리 안에 자식을 집어넣을 수 있는 이들은 행복을 논할 자격이 부여된다. 그 안에 들지 못하는 엄마들은 끊임없는 패배의식과 결핍에 시달리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우울증에 시달려 자식과 함께 몸을 던지는 극단의 선택을 하는 이들도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산후조리원에 입실하는 것 또한 일반인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의 향유에 속한다. 본인이 알기로는 산후조리원 2주 입실료는 삼백만원 가까이로 추산된다. 또한 그 삼백만원이라는 금액에 해당되는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어 산후조리원 운영자측과 산모들의 민감한 대립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즉 현실에서 산후조리원이라는 공간의 함의는 긍정적 기능만을 지닌 곳이 아니다. 또한 그 속에서 맺어진 실팍한 인연은 여행지에서 같은 국적이라는 이유로 얼결에 맺는 일회적 인연에 다름 아니다.
결혼을 해도 자식을 갖지 않은 채 자신의 삶을 운용하는 부부들도 늘어나며 결혼을 회피하고 나홀로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런데도 텍스트에 등장하는 궁금녀는 낙태의 후유증으로 자궁을 적출한 후 아이를 갖지 못해 산후 조리원에서 아이를 안고 달아난다. 그녀는 연민의 대상이 되므로써 이해받는다. 불모의 여성성으로 인해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결핍은 다른 대체물로 대신할 수 없고 종국엔 미쳐버리는 것이 이들의 말로인가?
더불어 아이를 낙태하길 강요당하며 전 애인에게 버림받은 미혼모의 산후조리원 입성은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기 위한 개연성 없는 설정으로 보인다. 입양 공화국 1위라는 타이틀은 아이를 낳는 것은 어쩌면 키우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는 현실을 말해준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개인의 결핍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게 만드는 타자의 시선이라는 규율권력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 모두 이 시선에서 자유로운 이는 없다. 미혼모는 경제력과 사회적 시선이라는 두 가지 극복 과제에 처한다. 의식과 제도가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의 의지와 각성만을 요구하는 것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요즘 들어 재외한국인에 대한 서사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매 맞고 사는 외국계 여성들에 대한 일차원적인 관심에 그친다. 이는 제도를 통해서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앞으로 제기될 문제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처하게 될 정체성에 관한 문제다. 또 다른 계층의 분화가 피부색의 차이로 발현될 것이다. 제도의 개선보다 시급한 것은 의식의 변화이다. ‘다문화’라는 어휘 자체가 그들을 우리와는 다른 존재라는 차이로써 규정 짖고 있다. 물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처우는 개선되어야 하지만 이를 연민의 시선으로 등치시켜서는 안된다.
텍스트, 콘텍스트적으로 정상과 비정상, 일상과 비일상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는 지양되어야 한다. 보편을 위한 서사는 보편이라는 바운더리에 편입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자신의 결핍을 환기시키게 만든다. 현대인들의 삶의 양태는 다원화되고 있다. 파편화되고 분자화된 현대인의 삶에 모범답안은 없다. 개별 주체의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의식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가슴속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상징적 질서와 제도로 인해 이루어진 이 세계가 와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 인륜성을 복원하고 지향하는 것은 좋은 세상 만들기의 노력으로써 지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일원론적이며 목적지향적 언술은 복잡다단한 상황에 직면한 현대인의 심금을 울리지 못한다. 소소한 일상의 재미는 TV 드라마를 통해서도, 인터넷으로 다운 받은 영화를 통해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연극은 이와는 달라야 한다.
‘엄마’라는 호명에 가슴 뭉클하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나’라는 주체를 세상에 내놓은 엄마는 위대한 존재임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다만 ‘나’에게 있어 위대한 존재 일 뿐이다. 모성애는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라 세상 모든 암컷의 숙명, 본능의 발현, 자기애의 또 다른 이면이다. 여성은 필연이나 엄마는 다량의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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