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주의, 레퀴엠 - <아마데우스>
최고 관리자 / 2012-04-26 / 조회수 7999
고전주의, 레퀴엠
백승무(연극평론가, 서울대 강사)
공연명: <아마데우스>
원작: 피터 셰퍼
연출: 전훈
상연일시: 2011.12.07 ~ 2012.01.01
상연장소: 명동예술극장
관극일시: 2011.12.21. 15:00
무색무향무취무미
전 세계 곳곳에서 떠들썩한 팡파르를 울리며 흥행가도를 질주하는 작품, 스크린에 오른 동명영화도 이에 못지않아 그 해 아카데미상 8개 부분을 석권한 작품. 이쯤 되면 배포가 큰 연출가도 ‘쫄기’ 마련이다. 이런 공연은 어지간히 해도 북데기 취급이고, 밑지면 욕사발이기 때문이다. 흥행제조기 피터 셰퍼의 <아마데우스>는 그래서 다루기 힘든 가시 장미와도 같다. 모차르트의 매혹적 선율과 밀로스 포먼 영화의 자극적 감성, 그리고 원작 자체의 활화산 같은 아우라가 도도한 색과 매력적인 향을 품은 장미를 연상시키지만, 무턱대고 덤볐다가는 가시 포화의 자상을 이겨낼 수가 없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서는 가시 창상의 쓰라린 통증을 증언해야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훈 연출의 <아마데우스>는 맛도 없고 멋도 없다. 손끝의 결도, 코끝의 향도 없다. 재미도 감동도 없다. 명불허전을 기대할 법도 한데 안타깝게도 먹을 거 없는 소문난 잔치집이다. 제대로 차려진 밥상임은 분명한데 감동을 맛볼 숟가락이 없다. 모차르트는 비실비실하고 살리에리는 뻣뻣하다. 인물의 형상화는 함량미달이고, 주제의 표현도 미진하다. 움직임은 건조하고 긴장감은 바닥이다. 살리에리의 모놀로그는 지루하고 환복장면도 답답하다. 리듬은 맥이 없고 템포는 구태의연하다. 공을 들인 음악도 무대에서 겉돈다. ‘라이브’ 음악을 죽여 버린 것이 의도가 아니라면 차라리 저렴한 녹음 CD가 나을 뻔했다. 무대 위에 새로운 현실(플래시백 극중극)을 이식시키는 피터 셰퍼 특유의 서사 기법도 고루하고, 코러스 역할을 하는 두 심복의 난장도 따분하기 그지없다. 차 떼고 포 떼고 결전에 나서는 황망함이 이런 것이다. 원작의 후광을 반납하고 텍스트와 정면대결하려는 승부사의 결기도, 관객의 심금을 놓고 ‘밀당’의 전투를 벌이려는 전사의 패기도 없다.
주인공을 주인공이라 부르지 못하고
이처럼 전훈의 <아마데우스>가 전장의 포효도 제대로 토하지 못하고 기진맥진 패주에 급급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서사전략의 실패를 꼽을 수 있다. 두 배역의 드라마적 위상과 관계 설정 자체에 오류가 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란 질문처럼 유치한 면이 없진 않지만 <아마데우스>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살리에리다! 의심의 여지없이, 혹은 의심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의 주인공은 살리에리다. 그가 고백과 회상이라는 배타적 서사를 이끄는 주도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신이 선사한 예정된 패배와 그 패배를 강요하는 절대 권위에 대한 위악적인 저항, ‘평범한 사람들’의 생존권을 옹호하려는 눈물겨운 투쟁 등 이 드라마의 이념적 과제를 온몸으로 성취하는 자는 바로 살리에리다. 제목 <아마데우스>는 세퍼의 착시전략, 즉 일종의 페인트 모션이며, 예정된 패배자 살리에리의 비극을 심화시키는 모티프에 불과하다. 도덕적 살인자라는 비극적 운명의 ‘깊은 골’을 보여주는 것이 이 드라마의 정수라면 우리의 인식 속에 각인된 모차르트의 명성은 병풍처럼 골을 감싸는 ‘높은 산’일 뿐이다.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선율과 ‘코믹엽기발랄’한 행동은 살리에리의 역동적이고 격렬한 ‘깊은 골’을 장식하는 인테리어다.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위인전이 아니며,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위대함을 석명하는 해설자가 아니다. 희생자와 가해자의 일방적 구도를 설정하거나, 살리에리의 서사행위를 이미 선악 판명이 종결된 피의자 최후진술로 처리하면 곤란하다. 관객이 보는 것은(혹은 봐야하는 것은) 살리에리가 구술하는 모차르트가 아니라, 모차르트를 보는 살리에리의 심리적 반응과 대응이어야 한다. 관객이 모차르트의 매혹적 선율에 심취하고 그의 영웅적 신화와 미스터리한 죽음에 귀 기울인다면, 그래서 살리에리의 독백이 지루하고 그가 쓰라리게 자술하는 심리의 파동이 충격과 경악을 야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실패한 공연이다. 그렇다면 이호재의 밋밋한 움직임에 신과의 밀약을 삶의 신조로 견지한 살리에리의 우뚝한 자존심과 그 대척의 질투심이 스며들어갈 공간이 없음은 자명하다. 신에 대한 복수를 위해 자신의 삶을 통째로 반납하는 살리에리의 애절한 분노도, 선과 악의 극단적 상통을 궤변의 논리로 내면화하는 자의 신산스러운 절골지통도 맛볼 수 없다. 이호재의 살리에리는 그저 이야기꾼, 해설자, 구경꾼에 머무르고, 그의 참담한 구변은 수다나 망령, 혹은 음흉한 몽니를 넘어서지 못한다. 물리적 노쇠함과 세월의 풍화에 무디어진 적의가 숫접고 섬약한 살리에리에 대한 변명이라면 옹색하기 그지없다. 젊어서도 늙어서도 살리에리는 회개하고 반성하고 자책하는 나약한 실존이 결코 아니다. 정치한 자기변명과 쉴 새 없는 저주의 화염을 발산하는 자가 살리에리다. 고백의 형식 속에 자기합리화의 암계를 숨기고 관객의 모가지를 움켜질 태세로 잔뜩 웅크리고 있는 자가 살리에리다. 핏줄이 끊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무대를 데굴데굴 구르지 않는 자라면, 하늘을 찌르는 원망과 살기로 벌겋게 달아오르지 않는 자라면 살리에리가 아니다. 김준호가 ‘신의 소리’와 ‘오입쟁이의 방탕’을 넘나드는 모차르트의 망망한 진폭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도 결국은 이 진단에서 멀지 않다. 살리에리의 오기와 교만이 다다른 고도에서 모차르트의 방종과 안하무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살리에리가 비등점에 오르지 못하면 모차르트는 절대 끓어 넘칠 수가 없다.
‘진인사대천명’의 모순
무엇보다도 연출가 전훈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각각 표상하고 있는 두 세계의 첨예한 대결과 파열을 드러내는 데 실패했다. 앞서 논증했듯이 <아마데우스>는 위대한 음악가 모차르트의 무고한 죽음과 저급한 질투심에서 사악한 음모를 자행한 한 인간의 자멸에 관한 역사-추리-심리극이 아니다. <아마데우스>은 개체 단위의 운명을 초월하는 두 가지 예술철학이 광범하고 심오한 교전을 펼치는 엄중한 전시 상황도를 그리고 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격돌이 대리하고 있는 이 사상 논쟁은 바로 고전주의 철학과 낭만주의 철학 간의 쟁투이다. 살리에리가 신봉하는 고전주의 예술관과 모차르트가 표방하는 낭만주의 예술관(모차르트가 고전파 음악의 완성자라는 역사적 사실은 접어두라. 이런 지식은 셰퍼 극의 이해에 별다른 도움이 되질 못한다)의 대결은 질투와 음모라는 심리적 범주를 초월하여 예술철학의 두 양상과 그 패러다임의 전환을 웅변하는 운동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신의 섭리로 포유된 절대진리와 표준화된 질서와 균형을 신봉하는 고전주의는 규범과 훈련을 통해 완성에 도달하는 ‘학습’의 시대였다. 예술은 기술과 큰 차이가 없었으며, 미적 가치의 완성도는 세계질서를 축조한 조물주의 축복과 이에 부응하는 예술가의 이해력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명석 판명한 이성과 절차탁마의 품성이 예술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좌우하는 척도였다.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기성예술에 대한 존경과 복종, 신의 진리에 대한 무한한 외경심은 고전주의 예술가가 체득해야할 필수적인 미덕이었다. 신이 그어놓은 존재의 경계를 넘어서는 행위는 타락과 방종으로 취급되었고, 규범(norm)을 파괴하는 시도는 비정상(abnormal)으로 낙인찍혔다. 외부세계는 그 자체로 완결된 오브제였기 때문에 그 구성 원리와 존재방식을 이해하는 심미안만이 예술에 허용된 유일한 자유였다. 살리에리의 인생관과 예술관이 이 고전주의적 법칙과 원리로 포화되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반면 세계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토대로 형성된 낭만주의는 고리타분한 고전주의 교설을 거부하고 인위에 반하는 자연스러움과 타고난 감성을 강조한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란 구호에서 볼 수 있듯이 문명의 때로 더럽혀진 유럽의 고전주의는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과 자유로운 감각을 통해 세척하고 정화해야할 대상이었다. 낭만주의는 절도와 중용의 미덕을 감정의 질주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간주했으며, 이성의 경직성을 상상과 직관의 칼날로 혁파하고자 했다. 고전주의의 폐쇄된 예술 회로에서 과감하게 이탈하여 자유로운 발상과 창조적 영감에 몰입한 낭만주의는 이성의 체계 ‘너머’와 ‘바깥’에서 존재의 해방과 사유의 풍요로움을 맛보았던 것이다. 자연이 배태한 ‘타고난’ 천재, 고전주의적 점잖음(bienseance)과 합리적 사고(vraissemblance)를 조롱하는 천연덕스러운 품성, 질서와 규칙 체계(canon)를 초월한 자유분방한 감성 등 모차르트를 규정하는 이 수식어들이 낭만주의를 길러낸 덕목이었다.
체계적 교육과 성실한 학습을 통한 전인적 인간상을 구현하는 살리에리와 ‘자연이 부여한 타고난 심성을 통해 예술에 규칙을 부여하는 천재적 소질’(칸트)을 가진 모차르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표상하는 두 가지 인간형의 상징이며, 두 극단적인 세계인식과 미학관을 위해 대리전을 수행하는 드라마적 이념소이다. 셰퍼는 두 예술가의 작품활동을 스케치하는 대목에서도 이러한 이원적 대립의 원칙을 유지한다. 모차르트의 저속함과 살리에리의 고상함을 대립시키기 위해 동원되는 작품들이 그것. 신과 영웅의 위대한 품격(고전적 이상형)을 강조하는 고전주의(살리에리의 작품으로는 <다나이우스>와 <오르무스의 왕 악수르>를 언급한다)와는 달리 낭만주의는 민중 특유의 언어와 풍습, 민족적 특성과 민속적 풍물 등 귀족 문화가 간과했던 내적 타자들을 애호했다. 모차르트의 “저속한 코미디” 후궁 탈출과 피가로의 결혼이 그것이다. <아마데우스>에서 이 이원적 대립항은 인물의 성격과 갈등양상뿐만 아니라,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의 배치와 무대 구성 차원까지도 지배하는 본질적인 동력원이다. <아마데우스>의 무대는 이 두 대립항이 인력과 척력을 발휘하는 강력한 자장의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전훈 연출의 <아마데우스>에는 모차르트에 대한 숭배와 찬양이 지배한다. 그리고 살리에리의 항변은 요설과 비겁한 변명으로 폄하되어 있다. 무대를 이념적으로, 이미지적으로 이원화하는 전선도 없다. 시대와 사상의 동력으로 충전되지 못한 인물은 낙오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이 공연의 필패론이다.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
다시 이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인 살리에리의 논변으로 돌아가자. 살리에리는 질투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의 분노가 질투에서 비롯된 것은 사실이나 그가 신의 의지를 거부하고 신에 대한 복수를 기도할 때 질투라는 심리적 동인은 이미 좁쌀만한 앙금으로 희석되어 있다. 철저한 맹신자였던 살리에리가 신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행위는 육식을 거부하는 채식주의나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 같은 수준의 것이 아니다. 질투라는 사사로운 감정은 이미 안중에도 없다. 살리에리가 반복적으로 내세우는 복수의 구호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옹호이다.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해도 불법·탈법 재산상속을 받은 부자들 앞에서 패배자가 되는 현실이 ‘불공평’의 표본이라면, 어릿광대 같은 개차반의 횡포(?)로 순식간에 이류인생이 된 모범생 살리에리의 신세 또한 ‘불공평’하다. 살리에리가 평생을 열등감에 시달리며 시지프스의 운명을 감당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신성한 수호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천재는 제자를 남기지 않는다. ‘천재의 제자’는 ‘대머리 여가수’처럼 모순형용이다. 천재의 자질이란 분유의 대상이 아니다. 예술에 있어서 천재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이다.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의 대상이다. 천재는 그렇게 수많은 과락자들을 배경으로 존재하는 자다. 천재 모차르트가 도달한 그 지고한 높이는 평범한 예술가들이 극복은커녕 평생 이르지도 못하는 절대기준이며, 그것은 고스란히 고통과 좌절, 절망의 크기로 등치된다. 신의 섭리에 대한 살리에리의 저항은 그의 단독범행이 아니다. 치 떨리는 분노와 억울함으로 작성된 살리에리의 항소장은 그가 옹호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찍어낸 것이다. 인간의 질서를 옹호하고자 하는 범인 측 변호사 살리에리! 일찍이 도스토옙스키가 ‘대심문관’(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설파한 그 자유의 딜레마가 여기서 겹쳐진다. 살리에리가 그 집단항명의 대변자가 된 것은 그가 ‘질투하는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차르트의 음악 속에서 신의 음성을 엿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살리에리를 통해서 우리가 체감해야하는 비극적 파토스는 무엇인가. 살리에리가 껴안은 비극의 요체는 그가 자신의 최종적 패배를 알면서도, 아니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 구원불가능한 저주의 수렁에 자신을 밀어 넣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판별할 수 있는 유일한 증언자이며, 이것은 고전주의자 살리에리에게는 저주와도 같은 능력이다. 영원한 2인자, 영원한 페이스메이커의 운명! 자신이 겪는 고통을 후대인에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유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스스로 선지자의 가면을 쓰고 순교자의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위악적인 범죄행위를 통해 신의 질서를 파괴하고 천상의 조화를 짓이겨버리려는 심사이다. 자신의 악덕이 심대할수록 신의 얼굴도 흉측해지고 신의 모순도 커진다는 논리이다. 신의 창조물인 모차르트에게 ‘칼자국’을 가하는 것. 자신의 존재를 악 속으로 내던져 신이 창조한 세계를 추악하게 오염시키겠다는 것. 그는 자기 이름 앞에 천재의 살인자라는 오명이 레테르처럼 영원히 함께 할 것이란 것도 잘 알고 있다. “모차르트의 명성이 커질수록 나도 유명해질 것”이라는 그의 독설 속에는 스스로 악랄해질수록 모차르트의 위대함 또한 더욱 더 빛날 것이라는 통찰도 포함되어 있다.
백전백패의 공식
서사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살리에리의 진술 전략은 참회의 고백이라기보다 폭로적 발설욕망에 가깝다. <아마데우스>에는 ‘고백은 있되, 참회는 없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모차르트의 대척점에 위치시킴으로서 자신의 전략을 수행한다. 살리에리는 신과도 맞장을 놓는 배포 큰 확신범이다. 따라서 살리에리를 패배자나 폐인으로 격하시키는 연출은 실패를 예정할 수밖에 없다. 분노의 핏줄이 서릿발처럼 곤두서있는 그의 독설과 여전히 신의 고객 역을 맡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냉소와 조롱을 여실히 드러내지 못하는 연출은 백전백패이다. 고전주의 vs 낭만주의 대결을 높은 각도에서 투시하는 포용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그저 텍스트 표층만을 내왕하는 ‘고전주의적’ 한계에 머무르거나 그 양극화된 두 세계 간의 긴장과 갈등을 미학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백약이 무효이다.
밋밋한 뒷배경에 영사빔을 투사하여 화려하고 다채로운 공간감을 창출한 무대효과(무대디자인 박동우)는 이 공연의 백미이다. 평면 위에서 다양한 입체를 추출하는 절묘한 아이디어는 변검술을 보는 것처럼 신기하고 희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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