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기 부부를 위한, 진부하지만 아름다운 동화 - <나도 아내가 있다>
최고 관리자 / 2012-04-12 / 조회수 3640
권태기 부부를 위한, 진부하지만 아름다운 동화 - <나도 아내가 있다>
김태희
연출 : 류근혜
원작 : 김광탁
공연기간: 2011.10.7.~2012.1.1.
공연장소: 대학로 PMC소극장
관람일시: 2011.12.2.
연말이다. 송년회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연말 모임들에서 빈번히 화제에 오르는 주제 중에 하나는 ‘결혼’이다. 이 좁은 땅의 모든 노처녀와 노총각들은 순식간에 결혼 못한 죄인이 되어 버리고, 내년에는 기필코 결혼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또 다시 하곤 한다. 도대체 결혼이 뭐 길래 가족 모임, 연말 모임 자리에서마다 화두가 되는 건가. 혹자는 결혼이 무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결혼해서 그럭저럭 살다가 애 한둘 낳고, 살림과 육아를 병행하는 아내들은 지쳐버리고 먹여 살릴 입이 여럿인 남편들은 회사와 집, 술집을 오가고 크고 작은 싸움은 전쟁같이 반복된다. 그렇다면 그런 결혼쯤이야,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던가.
<나도 아내가 있다>는 결혼에 대한 그런 염려의 무게를 덜어주는, 권태기 부부의 아름다운 동화다. 1987년 창립된 극단 로얄씨어터는 벌써 132회 정기 공연을 올리고 있는, 연륜과 역사가 있는 무게 있는 극단 중의 하나이다. 아울러 지속적으로 연구생과 극단원을 모집해서 새로운 인재들을 발굴, 교육해오고 있으며 각종 연극제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존재감 있는 극단이기도 하다. <나도 아내가 있다>는 원제인 <황소 지붕위로 올리기>라는 제목으로 이미 2009년 김광탁 작가의 연출로 무대에 올랐던 작품으로, 로얄씨어터에서는 두 번째 공연에 올리는 작품이다. 김광탁 작가의 탄탄한 글쓰기와 이미 다년간 많은 작품을 연출한 류근혜 연출가의 연출력이 만나 관람 전부터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다.
싸우는 당사자는 모르지만 TV드라마의 재방송 보듯이 반복되는 것이 부부싸움이다. 그 정도와 주제에 조금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비슷한 대목에서 서로 화를 내고 답답해하다가 끝내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도 아내가 있다>에 등장하는 중년 부부 역시 마찬가지이다. 실직한지 5년이 된 남편은 항상 같은 일로 아내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아내는 남편이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에게 인스턴트 음식을 먹이고 바닥을 휴지로 닦는다. 서로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이 이상한 부부의 행동은, 비단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적인 연인, 부부라면 공감할만한 대목이다. 어릴 때 싸우는 부모님을 보면서 이런 생각 한번 안 해봤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급기야 아내는 조금만 행복해지고 싶다며 여행을 제안하고 그렇게 해서 부부는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고작 이 여행하나로 싸움이 일단락된다면, 이들이 정말 부부겠는가. 여행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아내와 남편은 또 싸우기 시작한다. 이웃집 여자와 미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남편, 첫사랑 남자를 여러 번씩 만나러 다니는 아내, 평생소원인 불국사 종소리를 들으러 가고 싶은 남편과 경주가 고향이어서 불국사만은 피하고 싶은 아내와의 싸움은 지긋지긋하게 반복된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5년 만에 남편은 번듯한 출판사 팀장으로 취직을 하며, 아내가 첫사랑을 만난 이유가 결국은 남편의 취직을 부탁하기 위함이었음이 밝혀지고, 남편이 아내를 위해 해바라기 꽃다발을 사서 강남역에서 성남까지 걸어온 사실이 드러난다. 이들 부부는 서로에게 미안함과 감동을 느끼고 새삼스럽게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런 동화 같은 이야기가 또 있을까. 실제로 많은 부부들이 권태기를 이기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것에 비해 이 작품 속 부부의 일상은 ‘사랑’으로 극복되고 있다. 부부간의 갈등은 비교적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데에 반해 극적 결말은 지극히 환상적인,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습으로 형상화 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부부는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같은 곳을 향해가지만, 그 와중에도 ‘깨알같은 말다툼’은 끊이질 않는다. 결국 이 작품은 평범한 부부가 당면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에서 묘하게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무대의 공간은 크게 둘로 나뉘어져서 각각의 서사를 담당하고 있다. 오른쪽 공간은 여느 가정집의 거실로 꾸며지고, 왼쪽은 아내가 몰고 다니는 자동차가 서 있는 집 밖의 장소로 묘사된다. 매일 같은 문제로 싸우기를 반복하던 부부가 여행을 가기로 결정을 하면서 서사의 중심은 왼쪽으로 옮겨간다. 그러면서 오른쪽 공간에서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에 따른 회상 장면들이 연출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공간의 분할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공간의 표현 방식에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김광탁 작가가 연출한 원작에서는 자동차를 상자 두 개로 대치하고, 배우들이 서로 등지고 말싸움을 벌이는 등 부조리극적인 수법들을 극대화하여 표현하였다. 그런데 이 작품의 오른쪽 무대는 현실적인 공간으로 구성되고 있어 인물들이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순간에 이질감이 확산된다. 오른쪽 무대에서 배우들이 끊임없이 말을 거는데 배경은 현실적인 몰입을 강요하는 느낌이 강하다. 가운데 중심이 되는 쇼파 외의 가구와 중간 벽은 아예 생략하여 단순화하는 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TV 드라마를 통해 익숙한 배우 김혜정이 연기하는 ‘아내’는 지나치게 애교 있는 성격으로 그려진다.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와 행동들이 만들어내는 부부싸움의 장면들은 지극히 공감가는 현실적인 이야기임에 비해, 과도하게 애교 있는 아내의 모습은 오히려 몰입을 방해한다. 오히려 극의 재미를 유도하고 있는 것은 ‘멀티맨’의 역할이었다. 극중 양아치, 경찰, 선생님, 음식 파는 사람, 옆집 여자, 스님으로 분하는 멀티맨은 관객들의 웃음을 유도하며 극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전반적인 재미와 웃음의 포인트가 멀티맨에게로만 집중되고 있어 전체적인 균형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관객의 연령층이었다. 간혹 데이트 삼아 손 꼭 붙들고 연극을 관람하러 오는 중년 부부 커플을 본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많은 중년 관객들이 객석을 채우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낯선 풍경이었다. 어린 커플들은 한 커플이었고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중년의 남녀이거나 혹은 딸과 함께 방문한 중년의 부인이었다. 그들은 배우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웃고 공감하고, 심지어는 추임새까지 넣으며 인물들의 행동을 부추겼다. 속 썩이는 남편을 보고 한숨을 내쉬다가도 다시 취직이 되었다고 해바라기를 내미는 모습에 환호하는 중년 여성 관객들을 보면 확실히 <나도 아내가 있다>는 진부한 권태기 부부의 일상사를 다루면서도 중년 여성들의 쓰린 속을 달래주는, 한편의 아름다운 동화임이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