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슬랍스키거나 말거나, 혹은 체호프도 저리 가! 연극<갈매기>
최고 관리자 / 2012-04-12 / 조회수 5388
스타니슬랍스키거나 말거나, 혹은 체호프도 저리
가!
제목: 「갈매기」 극작: 안톤 체호프 연출: 오경택 상연일시: 2011.11.25 ~ 2011.12.11 상연장소: 서강대 메리홀 관극일시: 2011.12.11. 15:00
체호프로 가는 길
전 세계적으로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공연되는 체호프이지만, 그의 공연을 올리는 일은 어지간한 배포로는 녹록치 않다.
사건의 부재나 소통의 단절 등 非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체호프의 말을 빌자면, “모든 드라마 규칙에 반하는” 극작풍 때문만은 아니다. 체호프가
제대로 수용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앞에 놓인 높다란 장벽 때문이다. 동서양의 거리, 혹은 상이한 오감 구조가 그대로 높이로 치환된 실팍하고도
강고한 인식의 장벽. 그동안 많은 연출가들이 이 장벽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자신만의 삼투압으로 장벽 너머의 체호프를 흡인하려고 몸부림쳤지만,
창작자의 재미(interesting)와 관객의 재미(exciting)는 어긋나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 체호프 작품은 재미없는 희곡, 재미있더라도
표현하기가 너무나도 지난한 대상이 되어버렸다. 당대 체호프가 발산했던 혁신의 아우라는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고답의 늪에서 허우적거렸고, 그의
작품에 내재한 삶의 비의는 재현불가능한 탐미의 방언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우리에게 체호프는 손에 닿지 않는 ‘신포도’거나, 잡힐 듯, 보일 듯한
신기루와도 같았다 우리의 손을 내치고, 우리의 눈을 가로막는 장벽 때문이다. 이 장벽을 축조하는 구성요소들은 심리적 정서나 문화적 감성(문화코드)부터 역사적 조건, 연극사적 맥락까지 다양하다.
체호프로 가는 길을 막고선 이 장벽의 구성목록을 살펴보면 역으로 그 해체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다. 장벽 너머를 투시할 수 있는 예리한
부감(俯瞰) 능력이야 말로 체호프를 영접할 수 있는 최고의 비법이기 때문이다.
심리의 장벽
먼저 우리와 다른 체호프의 심리적 정서란 무엇인가? 일단 체호프의 ‘심리’에 대해 논하기 전에 우리 연극에는 심리가
부재함을 인정해야겠다. 역사적으로, 장르적으로 한국 연극에서는 아직 드라마적 심리가 계발되지 못했다. 고뇌와 갈등을 표상하는 햄릿, 탐구정신과
절대자유를 상징하는 파우스트, 저돌성과 과대망상을 실천하는 돈키호테, 혹은 가까운 예로 해롤드 핀터의 불안한 주체나 피터 셰퍼의 나르시시즘적
자아 등 내면세계가 구체적인 물성을 띠고 인물상을 구축하는 유형이 없다는 것. 광장의 이명준처럼 시대정신의 외연과 내적 욕동의 표피를
말과 행동 속에서 자연스레 뿜어내는 상징적 심리체계가 없다는 것. 설령 있더라도 아직 역사화 되지 못했거나, 추상명사화 되지 못했다는 것.
작가나 연출가가 엿보고, 인용하고, 참조하고, 배반할 구체적 심리와 기질이 없으므로 인물들은 서사의 구연자나 극적 상황의 부하물 이상이 될 수가
없다. 처세술의 달인 꺼삐딴 리와 히스테리의 화신 B사감을 무대 위에서 체험하지 못한 한국연극이 상황⟶인물⟶심리로 수렴되어진 체호프의 세계를
조감하기엔 당연히 역부족이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심리는 책으로 학습한다고 체득되는 게 아니다. 심리가 하나의 구조라는 점에서 그것은
‘창조’되기보다는 ‘활용’되는 대상이다. 「시골에서의 한 달」(투르게네프)에서 흘러나와 「이바노프」에서 지류를 형성하고 「갈매기」에서 대해를
이루는 체호프의 심리는 장구한 세월과 두터운 문화적 축적물이 길러낸 역사적 산물이다. 게다가 체호프의 심리는 양가적이고 미완결된 발화를 통해서
드러난다. 행간의 미세한 의미와 단락 간 컨텍스트를 해독하지 못하면 텍스트의 지옥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체호프의 인물들이 일류 단편소설가의
간결하고 섬교한 펜 끝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가려지고 은닉된 체호프의 심리는 드러남과 폭로를 목표로 하는 ‘사건’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연극성의 본좌를 차지한 ‘사건’과 그 사건에 연루된 번잡스러운 언어를 극복하는 유일한 대항마로서 심리가 전면에
등장한 것. 말을 극복하는 심리, 언어를 대체하는 심리에 대한 예민한 촉수가 없으면 체호프는 지리멸렬하다.
문화의 장벽
체호프의 이해를 저해하는 두 번째 장벽은 러시아적 문화코드에 대한 설면함에서 비롯된다. 「갈매기」(를 비롯한 체호프
장막극)의 배경이 되는 폐쇄된 시골공간을 보자. 도시인의 도착과 떠남, 트레플레프의 중앙문단 데뷔, 니나의 도시 무대활동, 도시에서 살고픈
소린의 염원 등 「갈매기」에는 도시와 지방의 대결이 존재론적 차원의 쟁투로 비화되고 있다. 대도시 인기작가와의 사투(자살시도와 결투신청), 그로
인한 니나와의 결별, 자신의 문학세계를 조롱하는 중앙평단의 횡포 등이 트레플레프가 겪었거나 겪고 있는 고통의 목록들이다. 시골은 존재의
폐허이다. 좌절과 몰락, 무기력이 판을 치는 죽음의 공간이다. 떠난 자(니나)도, 돌아온 자(소린)도, 남아있던 자(트레플레프)도 망각과 영락의
족쇄를 풀어낼 수가 없다. 이는 중앙정치판에서 소외되었던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들의 실존적 절망과 한 궤를 형성한다. 여기서 러시아 특유의
문화코드인 권태와 나태가 유래한다. 우리 민족이 가장 저주하는 품성들! 트레플레프의 글쓰기와 니나를 향한 맹목적 사랑이 자신의 불안과 분열을
은폐하기 위한 자의식적 방어이며, 자기의 존재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최후저지선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것이 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이 숙명처럼
간직해야했던 생존의 비법이라는 사실, 즉, 당대 주변부 지식인들이 선택한 권태와 나태라는 자폐적·자학적 태도가 시대의 불모성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트레플레프의 자살이 갖는 드라마적 진정성이 납득가능할 것이다. 이쯤 되면 그의 자살을 철부지의 격분이나
베르네르주의로 얼렁뚱땅 덮어버리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모한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연극사적 장벽
셋째, 19세기 말의 연극사적 맥락도 체호프의 이해를 위해 반드시 넘어야할 산이다. 체호프가 등장하던 시기는 대중취향적
상업극이 무대를 점령하던 well-made play의 전성기이자 이를 극복할 새로운 연극에 대한 열망이 들끓던 때였다. 이미 스트린트베리,
입센, 메테를링크 등이 ‘새로운 드라마’(new drama) 운동에 불을 지폈고, 이 불길은 순식간에 러시아 무대로 옮아붙었다. 작위성과
우연성, 천편일률성, 오락성을 거부하는 새로운 극작 양식에 대한 요구가 비등했다. 스타니슬랍스키가 모스크바예술극장 개관공연으로 체호프의
「갈매기」를 선택한 것은 마치 예정된 주인공의 등장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인다. 「갈매기」에서 well-made play의 애용품인 살인,
음모, 반전, 출생의 비밀, 폭로, 뒤얽힌 연정, 불륜 등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어긋난 사랑도, 불행한 가족사도 well-made
play처럼 타오를 듯하다가 소진되어 버린다. 기존 극을 조롱이라도 하듯이 체호프는 절제하고 생략한다. 구태의연한 선악 구도와 갈등의 극적
청산은 없다. 헛된 욕망과 허망한 감정들은 가차없이 절삭되고 절망의 정조와 낙담의 분위기만이 주인행세를 한다. ‘그렇고 그런’, 혹은 ‘내 맘
같지 않는’ 비정한 삶 자체만이 제대로 된 주인공이다. 에누리는 없다. 체호프는 이것이 진정한 삶의 모습이라고 선언한다. 삶을 소재로
조작해낸·흉내낸 극성(dramatism)이 아니라, 삶 자체의 극성을 드러낸 것이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받지 않는다?
문제는 「갈매기」를 탄생시킨 이러한 배경들이 체호프로 가는 길을 막아선 장벽이 되어 우리의 시선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이런 배경들을 무대 위로 끌고 와서 보따리장수가 되든지, 즉, 「갈매기」가 집필된 1896년의 감성으로
관객들에게 세례를 베풀 것인지, 아니면 체호프의 장벽 앞에서 과감히 회군하여 우리식 공연을 만들 것인지. 오경택 연출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의
「갈매기」를 성공한 공연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경택 연출이 위의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수많은 연출가들의 시행착오를
단호히 물리치고 과감하게 자신만의 해석과 전략에 몰두한 덕분이다. 물론 그의 「갈매기」는 아직 ‘성공한 공연’이라기보다 ‘성공한 회군’에
가깝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의 ‘회군’은 배신이나 반란이 아니라 축배를 들 경사임이 분명하다. 넘기 힘든 장벽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깨끗하게
외면하는 것, 그래서 우회로든, 퇴각로든 제 갈 길을 가는 풍모는 「갈매기」 실패史가 이룩한 대단한 성과임에 틀림없다. 유쾌한 아이러니다.
장수의 칼날
첫째, 오경택 연출은 「갈매기」를 따라다니는 수식어와도 같았던 스타니슬랍스키의 이름을 지워냈다. 물론 알렉산드린스키극장의
「갈매기」 실패 이후 “700년을 더 살더라도 절대 희곡은 쓰지 않겠다”던 체호프를 호출하여 작금의 명성에 이르도록 생명을 불어넣어준
스타니슬랍스키의 공과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스타니슬랍스키가 내 작품을 망치고 있다.”고 투덜대며 그가 연기한 트리고린이 중풍환자 같다고
악담을 늘어놓은 체호프의 불만을 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체호프 공연의 성패가 스타니슬랍스키의 프리즘에 저당 잡혀 볼모신세에 있다면,
그래서 그것이 체호프에 도달하기도 전에 연출가들을 기진맥진하게 만들기도 한다면 감연하게 내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오경택 연출의 「갈매기」에
스타니슬랍스키는 없다(물론 그의 연기훈련술이 아니라, ‘무대적 사실주의’라 불리는 연출술을 말한다). 스타니슬랍스키風의 ‘만약’ 공식과 집중,
이완의 연출법이 없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잃은 것은 사슬이고, 얻은 것은 자유다. 무대도, 연기도, 장면해석도 억눌리고 조심스런 기색이 없다.
원작의 개작도 적당하고 적절하다. ‘성공한 회군’을 수행한 장수치고는 겸손할 정도다.
채우고 메우고
둘째, 오경택 연출은 체호프가 의도적으로 미완결 상태로 만든 대사, 혹은 대사 사이의 ‘휴지’를 알차게 채워 넣었다.
‘심리’나 ‘분위기’가 삽입·형상화되어야 하는 지점들, 대부분의 연출가들이 의미의 공백으로 방치해버렸던 그 부분들을 애드리브나 짧은 문구로
빼곡히 메웠다. 뿐만 아니다. 스타니슬랍스키가 몰입과 집중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이른바 ‘내면연기’의 자리에는 부산스러운 동선과 끊임없는 제스처가
들어섰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애제자이자 강력한 경쟁자였던 메이에르홀드의 주장, 즉 ‘관객은 들으러 온 게 아니라, 보러 온 것이다’라는 모토가
실현된 순간! 체호프 특유의 양가적 모호성도 말끔히 제거된다. 인물도, 장면도 애매하거나 불명확하지 않다. 연출은 선명하고 적확한 자신의 관점을
고수한다. 그리고 그걸 정확하게 표현해낸다. 게다가 친절하고도 자상하다. 논리적이기보다는 몽타주에 가까운 체호프의 장면 전환에는 전후로 여백이
많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도 예비연기와 마무리연기로 깔끔히 마감을 해주고 있다. 장애물이 없는 무대설정 덕분이기도 하지만, 인물들의 등퇴장으로
장면들 간의 이음새를 보강한 것도 애교 넘치는 볼거리다.
연출의 변조는 무죄!
셋째,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색다르고 독특한 인물성격의 변조이다. 침울하고 내성적인 트레플레프는 활달과 우울을
반복하는 조울증 풋내기로, 능란하고 교활한 아르카디나는 히스테릭한 철부지로, 차분하고 우유부단한 트리고린은 자학적인 냉소가로, 무미건조하고
엄격한 마샤는 경박하고 무모한 패배자로 바뀐다. 역시 돋보이는 것은 「갈매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니나의 형상. 오경택 연출의 니나는
트레플레프의 가족드라마에 무참히 희생되는 오필리아도, 구세대에 대항하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다 좌절하는 근대적 신여성도, 헛된 꿈을 좇아 자신의
삶을 탕진하는 어수룩한 시골처녀도 아니다. 청순, 발랄, 순진무구가 각인된 러시아판 바비인형! ‘심리’라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장기(臟器)를
말끔히 세척해낸 ‘삼촌들’의 로망(싱크로율 100% ‘아이유’)! 얼마나 한국적이고 동시대적인 발상인가.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백치미의 화신이 망가지는 마지막 장면이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것. 아르카디나나 트리고린의 변조율을 상기한다면 뭔가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장면을 예상할 수도 있었는데, 의외로 차분하고 진지한 진행에 약간 실망한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중요한 점은 이런 참신한 변조가 ‘차이’의
생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작품의 총체성을 양육하는 토대로서 성실히 복무한다는 것이다. 체호프에 매몰되지 않고 과감히 체호프와 결별하려는 애초의
연출 입장을 짐작해 본다면, 이런 차이는 이질적이거나 혼돈스러운 게 아니라, 오히려 통일성 있고 일관된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성격의 변조가 새로운 장면해석을 창출하는 것도 자명한 사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장면들은 기존의 해석맥락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해석, 새로운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차별적 면모는 ‘약병’을 들고 있는 니나의 모습이나 작품 전체를 메타드라마로 각색해버리는 트리고린의
마지막 독백조차도 그리 놀랄 일 아닌 것으로 만든다.
오경택 연출의 「갈매기」의 가장 큰 미덕은 뭐니 뭐니 해도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다. 체호프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산하고
경쾌한 리듬감, ‘심리’의 공백을 기발한 유흥으로 슬쩍 이월시키는 손빠른 재간, 과장과 변조를 통해 선명성을 지향하는 성격묘사 등이 체호프의
강박을 극복하게 만든 묘수들이다. 스타니슬랍스키가 아니라고, 체호프가 아니라고 흉보지 마라. 왼손을 내미는데 오른쪽 장갑을 꺼내는 우를 범할
필요는 없다. 오경택은 오경택의 길을 간다. 그리고 그 길 끝에 체호프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체호프를 우리식으로 (제대로) 이해하는 첫걸음이자
큰 걸음이라 철석같이 믿는 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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