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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귀뚜라미가 온다
  • 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 2012-10-20 조회수 7659

무대 위로 소환된 잔혹한 진실

프로젝트 그룹 휘파람, <귀뚜라미가 온다>

 

백소연(이화여대 강사)

 


각색: 장용철 (소설 원작: 백가흠)

연출: 박장렬

극단: 프로젝트 그룹 휘파람

출연: 장용철, 정종훈, 권기대, 오용택, 이선희

공연 장소: 예술공간 서울

공연 기간: 2012.09.08-09.23

 

     몇 년 전 백가흠의 첫 단편집을 끝내 다 읽지 못하고 중도 포기를 선언한 적이 있었다. 소설 속에 묘사된 과도한 폭력과 섹스로 얼룩진 상황들은, 그것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작가의 궁극적 의도를 망각하게 만들 만큼, 시종일관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활자로 대면하는 일조차 견디기 힘든 마당에 이젠 그것의 무대화를 보아야 한다니, 객석에 앉아 연극 <귀뚜라미가 온다>를 기다리는 마음은 시작부터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원작의 의미를 잘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 지독한 상상력이 더욱 극단적인 불편함으로 표현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소설 원작이 무대라는 제약을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을지, 이율배반적이게도 작품을 기다리던 불쾌함은 이내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소설의 첫 대목처럼, 연극 역시 앞으로 펼쳐질 배경과 상황을 시작 장면에서부터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대 위에 놓인 분할된 두 개의 공간은 극의 배경이 되는 횟집과 분식점의 풍경을 적절히 재현하였다. 앞으로 인물들이 처하게 될 절망적 상황을 암시라도 하듯, 고립된 섬 안에서마저 다시금 고립된 듯한 이 공간들은 더욱 더 허름하고 암울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낡은 벽을 경계로 하나의 슬레이트 지붕 아래 놓인, 이 횟집과 분식점 안에는 각각 두 남녀와 모자가 동거 중이다. ‘바람 횟집의 남자는 뚱뚱한 연상의 여인을 엄마라 부르며 밤마다 섹스를 나눈다. 동시에 그와 이웃 한 달구 분식의 달구는 술에 취해 자신의 노모를 밤새도록 두들겨 패고 있다. 부푼 살집의 여자가 내는 킬킬거리는 낮은 웃음 소리와 날카로운 교성, 삭정이처럼 마른 노모가 내뱉는 고통에 찬 신음 소리와 희미한 흐느낌은 벽을 사이로 두고 서로 교차되며 겹쳐진다. 기묘하게 빛나던 어스름한 조명 아래로 들리던 이 소리들은 극의 분위기를 초반부터 더욱 그로테스크 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하였다.

     같은 지붕을 공유함으로써 하나로 연결되는 이들 사이의 가학과 피학의 고리는, 시종일관 기괴하며 병적인 상태로 이어진다. 모자 관계 혹은 유사 모자 관계를 기반으로 하지만, 이들 사이를 매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과도한 폭력과 병적인 섹스뿐이다. 흔히들 위로와 평화를 얻는 유일한 안식처로 가족을 명명해 왔다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일들은, 결국 그 이름에 덧씌워진 허구와 미몽을 폭로한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잔혹한 폭력과 도착적 섹스가 자행되는 이 곳이, 바로 현실의 벌거벗은 실상이자 세계의 축도(縮圖)라는 끔찍한 진실과 마주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빠져나갈 출구 없이 고착된 절망적 분위기 안에서도, 남자는 아이를 갖고 싶어 하며 노모는 아들이 어엿한 가정을 이루어 살기를 바란다. 이러한 소박한 소망들은 작품 속 전어의 상징과 다시금 강력히 연결되고 있다. 인근 횟집 주인들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전어가 바람 횟집에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순간 흥성스러워진다. 좁은 수족관을 메운 전어를 바라보며 이들 모두는 제 나름의 희망으로 잔뜩 부풀어 오른다.

     팔딱이는 전어들이 뿜어내던 은빛의 그 찬란함은 아름답고 강렬하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짧고 허무한 것이기도 하다. 며칠 버티지 못하고 이내 죽어 버린다는 전어의 본디 속성처럼 살아남은 전어들이 점차 줄어감에 따라, 극은 다시금 파국으로 치달아 간다. 바람 횟집과 달구 분식의 사람들이 품었던 마음 속 작은 바람들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불어 극의 초반부터 조금씩 감지되던 태풍 귀뚜라미의 존재는 이들 곁으로 더욱 가까이, 더욱 강력히 다가오게 된다. 점차 사그라들던 그들의 작은 희망은 이제 강한 바람결에, 밀려드는 파도에 모두 쓸려 나가 버린다. 그리고 사라진 삶의 터전 위에서 남자들은 그들이 가학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를 통해 한 줄기 삶의 의미를 구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와 어머니를 동시에 잃게 된다. 결국 이 작품은 잠시 품었던 다른 변화의 가능성마저 부인하며 그 시작만큼이나 잔혹하게 마무리 된다.

     이처럼, 연극은 원작 특유의 서사와 분위기, 작의를 제한된 공간 안에서 어느 정도 충실히 구현해 내고 있었다. 또한 때때로 공간에 대한 연출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는 지점은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일례로, 아들의 폭력을 피해 노모가 숨어드는 분식점 내 좁은 장롱 틈을 고무 욕조로 적절히 대체한 부분을 들 수 있다. 손쉽게 이동할 수 있는 이 작은 욕조는 궁지에 몰린 노모의 모습과 심리를 관객 앞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시각화 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기괴함과 잔혹함, 절망으로 직조된 극의 전체 분위기를 더욱 역설적으로 살려내야 할 전어의 이미지가 극 안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점은 결정적 한계로 비춰졌다. 물론, 전어 무리가 만들어 내는 은빛의 생생한 이미지들이란 무대 위에서 직접적으로 만들어내기 힘든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내세운 좁은 어항 안에 든 작고 조야한 붉은 집의 모형은 못내 그 상상력과 이미지의 빈약함에 아쉬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 뿐만 아니라, 바람 횟집과 달구 분식을 서서히 휘감아오던 태풍 귀뚜라미의 존재가 의인화 된 부분은 그로테스크함 속에서도 적절히 절제된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제대로 어우러지지 못하고 있었다. 극 초반부터 건들거리듯, 특이한 몸짓과 말투를 반복하던 귀뚜라미는 바람의 존재를 느끼게 만들려는 듯, 무대 위 소품들을 슬며시 건드리며 인물들 사이를 있는 듯 없는 듯 배회했지만, 어딘지 우스꽝스러운 인상만을 남겼다. 극의 중간 중간 등장해 그가 읊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사들 역시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잔인하고 도착적인 이 한 편의 연극을 보았다면 당연히 느끼고 고심했을 법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그 의미를 과연 직설적이며 단순한 대사들로 다시 되물었어야 했던 건지 끝내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완성도 있는 하나의 원작을 타 장르로 전환하는 데에는 일정의 안정과 모험이 동시에 뒤따르게 된다. 그런데 뚜렷한 장르적 차이를 넘어야 하는 경우라면, 원작에 대한 깊은 고민과 재해석이 있지 않는 한, 그것의 충실한 재현 그것을 성취하는 것만도 간단치 않은 일일 것이다. 소설 <귀뚜라미가 온다>가 보여줬던, 불온한 이미지들로 가득 찬 거침없는 묘사는 연극으로 옮겨지면서 그 수위가 일정 정도 약화되었다. 그러나 연극 <귀뚜라미가 온다>는 이 끔찍한 수성(獸性)의 세계를 재현할 다른 적절한 수단들을 충분히 동원해 내지는 못했다. 무대 위로 소환된 잔혹한 진실의 모습은, 여전히 원작의 그것을 넘어서기엔 역부족인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