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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평가 없는 평전, 그 서러운 인생 <전명출 평전>
  • 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 2012-08-21 조회수 9038

평가 없는 평전, 그 서러운 인생


남산예술센터 <전명출 평전> 

윤민지(한국연극 객원기자)

 

무대 바닥에는, 한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들이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신문기사들을 크게 확대해 무대 바닥을 채운 그 사건들은 10. 26. 사태, 삼풍백화점 붕괴, IMF 구제금융 등 대한민국 역사에 깊은 칼자국을 남긴 사건들이었다. 마치 바닥에 보이지 않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것 같았다. 그 구멍 위를, 이름을 널리 알리는 자 전명출(全名出)이 걷고 있었다.


무대 뒤에는,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주역인 건설을 상징하는 철제빔이 무대 뒤를 빼곡히 채우고 있다. 이제 겨우 뼈대를 잇고 있는 건물에서는 삐걱삐걱 대는 소리가 끊임 없이 들렸다.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는 아이의 골격 같은 철근. 그것을 밟는 인부의 발걸음은 더 없이 불안해 보였다. 전명출은 그런 곳에서 매달려 있었다.


한국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살아낸 정의로운 인간 <전명출 평전>(7. 10. ~ 7. 29. 남산예술센터, 박근형 연출)을 관통하는 흐름은 위태로움이었다. 전명출은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해 태어나 굵직굵직한 사건에는 항상 연관돼 있었다. 가난하지만 착실한 영농후계자에서 아파트 부실공사로 떼돈을 만지는 위치까지 신분상승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 전명출에게는 세 번의 매달림이 있었다. 영농후계자이지만 가난 때문에 마늘 오십 접을 훔쳤을 때, 처남댁과의 불륜이 들켜 모텔 벽 에어컨 환풍기에 매달려 있을 때, 마지막으로 순님에게마저 사기를 치고 야반도주 하려던 밤, 잠시 들렀던 우사에서 발을 헛디뎠을 때. 그러나 그는 그에게 닥친 위기에만 아이의 뼈처럼 얇고 약한 지푸라기를 잡고 있었던 게 아니다. 그는 평생, 죽을 때까지,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소시민 전명출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도전 정신으로 가득 채웠다. 그는 2012년 현재에도, 지루한 인생이 싫은 사람에게는 멋진 모험가이며 인생 한 방을 원하는 사람들의 역할 모델이다.


그러나 불안하다. 그에게는 무엇을 단단히 딛고 서 있다는 안정감이 없다. 그는 인생의 전환점에서는 내 의지가 아니라 신의 계시를 내세운다.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를 주장하다 삼청교육대에 다녀와서는, 공사장 소장이 원하는 대로 부실공사로 돈을 버는 것이 정의임을 받아들인다. 불륜이 유행이라며 처남댁과 선을 넘고 어느새 발 빠르게 토지보상금을 받아내는 그는 마치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 같다. 전명출 평전이라고 하지만, 그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전명출에게는 목숨 걸고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가치가 없다. 그에게 목숨 걸고 지키고자 하는 건 자기 목숨뿐이다.


그에게 정의란 시대에 따라 바뀐다. 그가 살아있는 한, 그는 어디선가 계속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원작에는 評者로, 공연에서는 전명출의 딸로 등장하는 광옥은 그에 대해 아무런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그가 아버지이기 때문일까? 광옥 역시 전명출을 평가할 수 있는 단단한 바닥이 없기 때문일까. 부인 순님은 남편을 환한 사람이라고 기억하지만, 그것은 행복하고 순수했던 과거가 주는 기억일 뿐이다. 이 작품은 평전이지만 평가가 없다.


그렇기에 현재 우리들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평전을 쓴다면 아마 대다수가 <전명출 평전>처럼 쓰여지지 않을까.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우연한 사건 때문에, 혹은 이번에만 잠깐이란 생각 때문에, 남들도 그렇게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을 합리화하며 가치 없는 이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건 아닌가.


커다란 극장에는 객석들이 꽉 들어차 시종일관 웃었다. 참기름처럼 고소하고 된장국처럼 구수한 사투리, 명배우들의 완벽한 연기, 공사현장ㆍ모텔ㆍ감옥ㆍ강가처럼 다양하게 변하는 무대, 망나니의 칼처럼 서슬이 시퍼런 신문기사들…. 60여 년에 이르는 대한민국 역사가 속도감 있게 진행되어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러나 이름을 알린다는 이름을 가진 전명출을 통해 나 자신은 어떤 매달림이 있었는지, 앞으로는 어디에 매달릴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죽기 전에 적어도 이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소 스무 마리…… (중략) 진짜 철도 없지 그게 뭐라고. 그거 스무 마리 장만하면 세상이 달라질 줄 알고 그 고생, 아이고 난 또 뭐라고…… 가자, 나는 또 뭐 대단한 거라고.” (전명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