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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복합적인 공간인 강(江)과 <과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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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관리자
201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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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복합적인 공간인 강(江)과 <과부들>
임혜경(숙명여대 불문과교수, 연극평론가)
작: 아리엘 도르프만, 연출: 이성열
출연: 예수정,한명구,오현경,이호성,전국향,이영숙,
이지하,김현영,박완규,박윤정, 외 다수
공동주최: 한국공연예술센터, 극단 백수광부
공연일: 2012년 6월1일~6월 10일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70년대 칠레, 쿠테타로 집권한 피노체트 독재 정권 하에서의 실종, 의문사 문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아리엘 도르프만의 작품<과부들>은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6.25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차범석의 <산불>을 연상시킨다. 두 작품 다 남자들은 전쟁터로 다 끌려가고 몇 년이고 생사를 알 길이 없고 정치가 뭔지 모르는 순박한 여자들만 남아 지난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 위에 <산불>은 어느 날 부상당한 한 남자의 출현으로 갈등이 시작되고, <과부들>은 어느 날 시체 한 구가 강으로 떠내려 오는 것으로 갈등이 시작되는데,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80년대에 우리나라도 칠레와 유사한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에 이 작품에서 우리는 공감대를 쉽게 느끼게 된다. <산불>도 그렇지만 이 작품 <과부들>도 이러한 정치적인 압제나 이데올러기적인 폭력에 직접적으로 고발하거나 항거하는 한 시대상을 재현하는 그런 작품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것으로 용서와 화해, 치유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작품이다. 그것도 정치와 무관해보이는 순박한 여성들의 희생을 통해서 정의, 역사적인 진실,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 간접적으로 고발하는 작품이다.
<과부들>의 첫 장면의 무대는 비사실적인 풍경 때문에 이강백 작, 이성열 연출의 <봄날>에서처럼 마치 동화나 설화의 세계로 우리를 데려다 줄 것 같은 분위기를 기대하게 한다. 무대 중앙에 강이 있고 그 주변 좌우로 둔덕이 있고 아주 단순화된 조형물로 된 나무들이 세워져 있다(극이 좀 진행된 후에 좌측 강가에 염소 세 마리 목각 모형이 서있기도 한다). 이렇게 비사실적으로 묘사된 풍경 아래, 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매우 사실적으로 빠르게 진행된다.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어느 시골 강변 마을에 지배 권력인 군대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아래 모든 남자들은 다 체포되거나 실종되고 여자들만 남아 끌려간 남자들의 소식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무대 오른 쪽 강가에 모여 떠들썩하게 빨래를 하고 있는 여자들이 있고, 맞은편 강가에는 독재 정권에 아버지, 남편, 아들을 빼앗긴 주인공 쏘피아(예수정)가 홀로 의자에 앉아 돌아오지 않는 남자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즉 움직임과 부동, 소란과 침묵이 대비되면서 첫 장면은 시작한다. 에우리피데스의 헤카베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합친 인물 같은 쏘피아는 혼자 남아 시체 한 구가 강에서 떠내려 오는 것을 발견한 후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패한 그 시체가 실종된 자기 아버지라고 주장하고 장례를 치르고 싶어 하지만 소요를 방지하기 위해 군부는 허가를 내주지 않고 시체를 불태워버린다. 곧 이어 또 다른 시체 한 구가 떠내려오자 이번엔 쏘피아 뿐만 아니라 이 마을의 많은 여자들이 각자 자기 가족이라고 주장하지만 군대는 결국 상관없는 다른 과부에게 시체를 양도하고 장례식을 치르게 되면서 과부들과 군부의 갈등 구조는 갈수록 팽팽해진다. 그녀들은 이 시체처럼 죽었으면 제대로 장례를 치룰 수 있게 해주든지 아니면 남자들이 살아 돌아오게 해달라고 그리고 살인자는 처벌해달라는 주장까지 한다. 이 강 마을에 새로 부임한 대위가 척박한 이 땅에 비료공장을 지어 비옥한 땅으로 개발하여 주민들을 화합시키고 잘 살게 만들겠다는 거창한 실용적, 이상주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일장 연설을 하지만 그녀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 대위가 더 이상 시체가 아닌 살아있는 남자 한 사람을 집에 돌려보내주자 여자들은 더욱 동요하고 희망을 품기 시작하지만 정작 돌아온 유일한 남자 (쏘피아의 아들)는 심한 고문으로 얼이 빠진 채 정상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이런 상황들을 지켜보면서 과부들은 합세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으면 강가에서 물러서지 않겠다고 군대에 통보하여 무장 군인들 앞에서 용감하게 시위를 시작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나고 있는데 이 때 극적 긴장은 최고 정점에 이른다.
중앙 무대 좌우측, 언덕 사이로 흐르는 강은 실종된 남자들(아버지, 남편, 아들, 삼촌, 조카, 손자 등)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 <과부들>에 나오는 서른여섯 명이나 되는 여자들과 독재 권력, 군부를 상징하는 군인들이 대립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그들 간의 거리, 대치 상황을 암시하기에 용이한 설정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대 전체 프레임은 바뀌지 않는 채 강은 무대에서 길어졌다 넓어졌다 한다. 길이가 길어질 때는 정면 화면을 사용하여 강물이 화면 위로 연결되면서 영상과 효과음의 시청각적인 이미지가 전개된다. 무대에서 강을 갈수록 더 넓어지게 만들기 위해 강변 둔덕을 죄우로 밀어낸다. 아르코대극장의 무대를 좌우로 최대한으로 확대 사용하면서 조명도 좌우 측면 조명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희곡상으로나 연출상으로 봐도 중심점은 강으로 보인다. 이 강과 여자들은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 속에 있었다. 주인공 쏘피아가 이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를 말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강은 “그들이 죽는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을 지켜보고, 온갖 데로 흘러가서, 내가 집을 잃거나 무엇을 잃어버리면, 다시 찾게 해준단다. 나는 강물에게 어떻게 물어봐야하는지를 배워야 해”(책,p.34-35).
쏘피아가 말하듯이, 강은 역사적인 증인일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이야기 해주고 해소시켜주는 지혜와 가르침을 주고 교훈을 주는 강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강은 삶과 죽음, 욕망과 사랑을 다 포함하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그래서 이성열 연출과 손호성 무대디자이너는 강의 존재에 중요성을 두면서 비어있는 중앙 무대 바닥이 강이 되도록 설정했다. 이 강의 좌우가 소피아와 과부들이 사는 주된 공간으로 만들었고, 주로 우측은 여자들과 대치하는 압제자 편의 대위, 중위를 위시한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때로는 중앙의 강 바닥은 대지로 변모하여 군인들의 공간으로 활용 되었는데 이 때 무대 천장에서 문 같은 프레임이 내려왔다. 강은 그들의 일상의 삶이 유지되게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시체가 떠내려오는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고 연인들의 만나는 사랑과 욕망의 공간이기도 하다. 강에서 떠내려오는 시체를 거두느라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 할 수도 있는 복합적인 공간이다.
어쨌든 이 과부들에게 강은 그녀들에게 초자연적 존재였다. 밤낮으로 강가에 나와 있는 주인공 쏘피아가 강물을 내버려두지 않고 있다고 믿을 정도이고, 쏘피아 자신은 강으로 떠내려 온 시체는 아버지가 장례를 치러달라고 딸에게 돌아온 것이라고 믿을 정도이다. 강물은 마치 물 속에 초자연적인 괴물이 살아 인간 세계에 대해 호불호 반응을 하는 것처럼, 강에서 첫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에는 갈수록 소리가 커졌다가 점점 낮아지고 조용해진다. 극의 상황에 따라 강물 소리는 점점 커지다가 위협적으로 들리기도 하고 전에 없이 큰 소리가 나기도 하고 물살이 빨라지기도 한다. 이렇게 강은 의인화되기도 하고 샤마니즘적인 존재로 이 마을의 모든 일을 다 지켜보고 있는 역사의 증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강은 삶과 죽음을 다 포용하고 있고, 이 마을의 상황에 무심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강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해산 명령에도 과부들은 물속으로 들어가 시체를 건져내고 총을 겨눈 군인들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이 작품은 끝이 나는데 이때 강은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
이번 공연은 조명으로 변화를 만든 강의 빛깔도 눈여겨 볼 만 했고, 그리고 거칠게 흘렀다가 잔잔했다 하는 강의 소리를 남미 풍의 음악을 사용하여 만들어 냈는데, 전체적으로 연출은 강을 캠퍼스(무대 화폭) 중앙에 담아내면서 연출 라인을 만들어냈다. 이성열은 그림을 잘 그리는 연출가이다. 이러한 화폭 속에다 수십명의 배우들을 움직여서 죽은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같은 감동적인 성화를 그려내기도 했고, 어슴프레한 조명아래 강가, 무덤가에 촛불을 들고 노래하고 춤추는 여성 코러스의 움직임으로 마치 그리스 비극의 한 장면처럼 살아 있는 그림을 만들어 냈다. 과부들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처럼 그룹으로 뭉쳐있으면서도 개별적인 개성으로 살아있었다(전국향, 이지하, 박윤정,김란희 등).
강건하면서도 희생과 저항의 여주인공 쏘피아 역의 예수정은(필자는 첫날 공연과 마지막날 공연을 보았음) 첫날 공연에서 보았을 때 전반부에서 포스가 떨어지다 후반부로 가면서 회복이 되는 느낌을 받았는데, 마지막 공연을 보았을 때는 첫날 공연과는 달리 전반적으로 중심이 잡힌 섬세한 내면 연기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과부들(예수정과 코러스)과 군인들(한명구,박완규와 코러스)과의 대치 장면에서 비롯된 남녀 배우들의 연기 대결도 볼 거리였다. 한명구-박완규의 안정감있는 연기는 좋았지만 원작에서 여자 코러스 만큼의 비중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런지 남자 코러스는 존재감이 약했다. 음악 연주도 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인 남성 코러스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허수아비나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게 만든 아이디어는 좋았다. 어쩌면 희곡에서부터 남녀 인물 양쪽의 힘의 배분이 균등하지 않게 보이기 때문에 어느 부분에서는 극적 긴장을 떨어질 수 있게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도 한다.
마지막 부분에 가서, 과부들이 더 이상 앉아 기다리지 않고 행동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의자 태우기 장면은 한번 더 감동을 줄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 무대 속, 멀리에 설치해, 멀리서 바라보게 만들었고 그 불의 효과가 약해 보여 아쉬움을 남겼다.
29명의 배우가 나오고 공연 시간이 3시간이나 되는 대작인 <과부들>, 함부로 연출을 꿈꿔보기 힘든 이 작품을 이성열은 <봄날>에 이어 자신의 대표작으로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