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 대티기자단
  • 웹진TTIS
  • 메일진

home 매거진 웹진TTIS

웹진TTIS

  • 제목 연극 토스카나
  • 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 2012-06-21 조회수 8055

연극 토스카나

 

이예은 


관극 : 2012. 5. 27(일)

공연장 : 아리랑 아트홀

작 : 세르지 벨벨

연출 : 서충식

출연 : 정일균, 고서희, 박경옥, 안영주

 

마르크는 자신이 원하던 직업, 사랑하는 부인, 좋은 친구들 등 행복의 모든 요소를 지닌 인물이다. 그런데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부인 조아나와 함께 토스카나로 여행을 떠난 그는 여행의 마지막 십 분 동안 알 수 없는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작품은 토스카나로 여행을 떠나는 마르크와 조아나의 시점에서 시작해서 바로 여행을 하고 돌아 온 마르크의 시점으로 이어진다. 극은 마지막 장면에 이를 때까지 마르크 자신 뿐 아니라 관객들 모두에게 토스카나에서의 마지막 십 분,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지 않은 상태로 진행된다.

극은 작품의 갈등과 고민과 질문의 시작점인 그 마지막 십 분을 불명확한 상태로 비워 둔 채 그 십 분을 에워싼 세계와 시간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작품은 물음표로 제시된 극의 시작점이 그 의미를 찾아가기까지의 과정인데, 결국 작품에서 말하고 보여주려 하는 것은 해답 자체가 아니라 그 답을 찾아가기까지의 것들이다.

마르크는 조아나의 핸드폰 벨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질적인 세계와 이질적인 시간으로 침투하는 경험을 한다. 그 이질성은 마르크의 무의식 혹은 왜곡된 기억, 불온한 상상력에서 발로한 것일 수도 있겠고, 극의 후반부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사실은 바로 매우 가까운 사람-라울-이 경험하고 있던 친연적인 현실의 대리 투영일 수도 있겠다.

현실과 비현실, 혹은 현실과 또 다른 현실 사이에서 사투하는 마르크의 몸부림은 결국 현실 세계의 모든 것들을 파탄의 지경에 이르게끔 만든다. 결국 조아나가 떠나가고, 직업도 가장 친한 친구도 잃는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제시된 왜곡된 틈의 순간들로 결국 현실적 조건들을 모두 비틀어져 버리고 마는데, 이 마지막 시점에서 이르러서야 비로소 토스카나에서의 마지막 십 분이 장면으로 제시된다. 그 장면에서는 이제껏 마르크의 의식선의 경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두 가지 연출 도구인 조아나의 핸드폰 벨소리와 달팽이 모양의 조명 고보가 도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채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을 어지럽게 난교시킨다. 그리하여 토스카나에서의 십 분을 두고 그것이 의식이냐 무의식이냐를 질문해 왔던 이 작품의 시간은 결국 이 두 세계 사이의 경계 자체를 소멸시킨 시간으로 끝을 맺는다.

마르크가 경험한 토스카나에서의 마지막 십 분은 어느 순간에라도 튀어나올지 모를, 우리 모두의 인생에 잠입해 있는 염증의 가능태들이다. 또한 그것은 세계와 세계 사이의 틈을 벌이는 균열의 순간에 대한 메타포이다. 우리 모두의 인생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망연한 공기, 그 공기 중에 늘 잠입해 있는 각성의 순간들. 일상의 시간 속에서 우리를 추락하게 만드는 순간들. 존재와 부재, 현재와 기억, 현실을 이루고 있는 삶과 그 이면의 빠뜨려진 것, 나의 것과 그 이상의 것 ‘사이’를 벌여 놓는 순간들...

그 순간들은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순간들은 불현듯 이제까지의 시간마저도 그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 순간들은 모호함의 아우라로 일상과 현실의 질서를 비트는 것이다. 토스카나의 마지막 십 분이 마르크의 현실을 통째로 비틀어 버린 것처럼. 그러나 막상 그 구토의 순간이 삶 속에 틈입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이성의 힘으로 제압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마치 마르크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은 세계와 세계 사이의 틈을 벌여 놓는 어느 균열의 순간을 ‘토스카나에서의 마지막 십 분’에 빗대어 보여준다. 공연 텍스트로서 이 작품은 의식과 무의식 세계의 장면들을 속도감 있게 교차시키며 그 균열의 순간들을 시각적으로 그려 내었는데, 이러한 연출법은 대본의 실험적인 내러티브를 오히려 평이하게 보여주었다. 세계상의 경계를 정형화된 코드들-동일하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와 달팽이 모양의 조명 고보-로 반복적으로 풀어낸 연출법은 관객으로 하여금 세계의 경계 자체에 서 있게 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세계와 세계 사이의 경계는 보다 불분명하고도 역동적일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공간의 사용 역시 그러하다. 무대 전면에 놓인 침실과 무대 중앙 부 좌, 우에 놓인 거실과 바 공간은 현실적인 공간들을 대변하며 때때로 다면적인 의미로 사용되었고, 무대 후면에 놓인 스테이지 공간은 욕실 샤워 룸, 여기가 아닌 ‘저 편’의 공간 등으로 사용되었다. 무대 공간은 이렇게 구획화된 몇 개의 공간으로 분할되어 제각기의 장면에서 파편화된 내러티브를 독점하고 있었고, 다음 장면에서는 또 다른 구획의 공간에게 그 독점권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의 정형화된 분할은 내러티브의 역동성을 지나치게 정리 정돈할 뿐 아니라, ‘움직임’으로서 내러티브를 끌어나가야 하는 배우들이 그려내는 몸의 동선, 그리고 그 동선을 좇는 관객들 시선의 동선을 차단시켰다. 내러티브가 무대에 구현될 때에 입체적으로 살아나야 하는 시각적인 역동성, 그리고 역동 안에서의 균형미가 창조되지 못하지 않았나 싶다. 이 작품에서처럼 ‘오고 가는 것’의 힘을 믿는 내러티브의 구조를 풀어나갈 때에는 특히나 공간의 역동적인 연출법이 중요시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시간의 흔들림을 의식한 텍스트인 만큼 시선의 흔들림을 공연의 무대 위에서 구현했더라면 더욱 작품의 의미가 풍성하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