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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역사를 재현하는 과잉의 몸짓, 연극 궁리
  • 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 2012-06-14 조회수 8949

역사를 재현하는 과잉의 몸짓

 

 

양근애(서울대 강사)

 

 

공연명: <궁리>

작,연출: 이윤택

공연일시: 2012. 4. 24. ~ 5. 13.

공연장소: 백성희장민호 극장

관극일시: 2012. 5. 8.

 

 

과연 역사극의 붐이라고 할 만하다. 극장에서나 안방에서나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관객/시청자들에게 속속 도착하고 있다.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고 특히 최근의 역사극은 역사적 사건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에 직면한 인간을 그린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게다가 사회적 정치적 사건이 돌출되는 시기에 역사극이 많이 생산, 소비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역사를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극이 다루고 있는 사실(史實)은 언제나 알레고리로서 사실 너머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윤택의 <궁리> 역시 사실을 다루되, 기록된 사실이 미처 보여주지 못한 ‘가능성으로서의 역사’를 가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작품은 세종실록에 실린 한 구절,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에서 실마리를 얻어 역사를 재구성한 역사극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 즉 왕조사나 정치경제사 중심의 대문자 역사에서 문화사, 미시사, 일상사 등 ‘작은 역사들’로의 이행을 보여줌과 동시에 기록된 역사에 대한 ‘두터운 묘사(thick description)’를 시도한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역사 교육에 의해) 알고 있는 세종조와 장영실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는 <궁리>에 와서 두터운 입체감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궁리>는 이 작품을 만든 이윤택 자신이 “서울 중심과 지역 자치, 인문학적 권력과 과학적 전문성, 중국 중심 동북아 정세 속에서의 한반도 등 다양한 화두가 녹아든 부산 문화 콘텐츠”라고 말할 정도로 ‘장영실 스토리텔링’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이 작품은 국제신문에 ‘연극소설’로 연재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을 소설, 뮤지컬, TV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매체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장영실을 역사 기록의 한 줄에서 욕망을 가진, 울고 웃는 한 인간으로 되살려낸 것은 이 연극의 가장 큰 미덕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역사극이란 역사서사와는 달리 무대라는 공간에서 가시화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물론 이때의 가시화란 무대 장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관객들은 무대 위의 장치뿐만 아니라 조명, 음악, 음향, 배우의 연기, 그리고 플롯을 감각적으로 느끼는 연극의 완성자이기 때문이다.

장영실이 자신을 단지 기술자가 아니라 과학자로 인식하는 순간, 그리고 세종이 그를 총애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순간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지배 논리를 역설하는 대신들과 그런 정치에 희생된 천민들의 소박한 욕망의 충돌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역사를 살아가는 인간의 고뇌를 무대 위에 형상화하는 것이 연극의 질문이자 대답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정교하고 논리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궁리>가 역사와 그 역사를 살아낸 한 인간을 다루는 데 있어서 일정한 장점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대화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편함이 남는다. 이 연극은 왜 장영실을, 세종을, 황희를, 임효돈을, 그리고 이름 없이 살아간 역사의 수많은 인물들을 극 속에서 그들대로 살아가게 하지 않는가. 바꿔 말하면 이 극이 역사를 대하는 논리가 인물을 장악해버려 역사에 대한 또다른 해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아마도 이윤택 연극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놀이성’-‘대중성’을 극의 육체로 녹여내는 방식 때문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이 방식은 관객을 스스로 들썩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몽시키려고 한다.


이윤택의 무대는 언제나 꽉 차 있다.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뜻은 아니다. 인물의 수와 상관없이 이윤택의 배우들은 대사와 심지어 행동조차 설명적이다. 장영실이 잠 속에서조차 주군에 대한 충심과 천문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으로 괴로워하는 꿈을 꿀 때, (에쿠스를 저절로 연상시키는) 흰 말들이 나오는 장면은 장영실의 고뇌를 드러낸다기 보다는 그것을 장식한다. 장영실이 함께 투옥된 사람들에게 자신이 고안한 측우기와 해시계, 자격루를 만드는 장면 역시 그가 얼마나 자신의 기술을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한 과도한 설명으로 보일 뿐이다. 게다가 극의 마지막에 연이어 몇 번이나 다른 방식으로 별자리를 보여주는 장면은 여백을 생략해버린 과잉의 장치로 보인다. 이 대목에서 장영실의 고뇌는 역사를 관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정서적인 것으로 봉합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장면들이 다 과잉이라는 뜻은 아니다. 첫 장면은 이 극의 주제를 함축할 만큼 강렬하고 상하로 나뉘어진 무대와 전체적인 톤은 이 극이 지향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출가 스스로 말한 ‘거리두기’ 연기의 방식이나 인물이 가지고 있는 내적 욕구와 모순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오히려 적절히 비어있어야 했던 것은 아닌가. 사실 가장 의아한 대목은 사실적이지 않은 양식을 지향하는 이 극이 고문 장면을 재현하는 자극적인 방식, 그리고 돌연 제 4의 벽을 깨뜨려 광대패들이 관객에게 떡을 나누어주고, 영실의 딸이 무대와 객석 경계에 서서 욕지거리를 뱉는 그런 장면들이다. 이 장면들은 관객들이 느끼고 생각할 여유를 빼앗는다. 무대와 관객 사이의 대화가 필요하다면 이렇게 일방적인 방식이어서는 안된다. 잘 만들었다고 해서 그 의도가 좋다고 해서 받아들이는 쪽이 무조건 그것을 용인하고 흡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연극이 관객에게 역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 그 방식의 우둘투둘함이 못내 아쉽다. 여백이 많았다면 관객들은 연극이 끝난 뒤에도 장영실을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상상’으로 출발한 이 극이 추구하는 ‘진실에 대한 짐작’은 극장이라는 공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뛰어난 작품은 언제나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양식을 넘어선다고 믿는다. 지금 우리의 극은 기실 사실주의극도, 서사극도, 부조리극도 제대로 성취하지 ‘않는다.’ 우리의 전통과 관습과 공통감각으로는 이러한 양식을 언제나 비껴가면서 ‘다르게’ 재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서둘러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서구에서부터 온 극 양식에 도달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우리 연극의 독특한 미학을 성찰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극이란 언제나 무대와 객석 ‘사이’를 의식해야 할 것이다. 그 사이를 좁히느냐 넓히느냐 혹은 그 사이에서 자유롭게 놀 것이냐는 연출가의 미학적 판단과 연극적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관객은 언제나 폭이 크고 넓은 기대지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