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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화된 현대인의 사랑과 불안을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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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관리자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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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여행자프로젝트] CRAVE+나의 검은 날개](http://www.xn--vk1br5hppx9qddtd.com/univticket/rbs/data/files/ccontents/1/201212171042241.jpg)
파편화된 현대인의 사랑과 불안을 이야기하다
극단 여행자 프로젝트
‘사랑의 역설과 힐링’이라는 주제로 극단 여행자가 연말 두 편의 연극으로 관객들을 찾았다. 12월 21일부터 28일까지 서강대 메리홀 소극장에서 진행되는 두 편의 연극은 역시 극단 여행자의 대표 연출가 두 명의 손에 의해 탄생되었다. 극단 여행자의 대표이자 상임 연출이면서 국내 유수 연출가들 사이에서도 감각적인 연출로 정평이 나 있는 양정웅 연출과 차세대 연극 연출가들 사이에서 역시 이미지 구축에 있어 독자적인 색깔을 보이는 조최효정 연출이 각각 한 작품씩 맡았다. 양정웅 연출의 는 영국의 여성 극작가 사라 케인의 동명 작품에 대한 국내 초연작이다. 조최효정 연출의 <나의 검은 날개>는 스위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저서 <불안>을 모티브로 하여 콜라주 형태로 표현한 극이다. 두 작품 모두 실험적 요소가 크게 두드러지며,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연극 의 무대는 특별한 연극적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테이블 두 개가 놓인 채 총 네 명의 배우가 의자에 앉아 있다. 무대 뒤편 대형 스크린에는 각각 배우들의 얼굴이 비춰진다. 는 특정하게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익명의 A,B,C,M 네 명의 인물이 각자 자신들의 상처와 사랑, 그리고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내용이 전개된다. 서사성과 논리성이 결여된 채 비일상적인 시적 언어와 파편화된 대사들로만 관객들은 극을 이해하는 입장에 처한다. 각 인물들 간의 대사와 대사의 연결로 하여금 드러나는 언어의 음악성이 한층 극을 고조시킨다. 관객들은 조용히 격해지는 배우들의 감정을 오롯이 대사와 스크린에 비추는 그들의 표정으로 읽어내야 하는 일종의 과제를 부여받는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일상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어떠한 이미지를 연상하게 될까? 보통 흔히들 사람들은 색깔로 말하면 열정과 닮은 빨간색이나 따스한 빛을 닮은 노란색을 떠올릴 것이다. 굳이 연인이나 부부 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통속적이고 개념적인 ‘사랑’은 행복이나 달콤함, 영원함을 떠올리게 한다. 역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사랑보다도 그 ‘사랑’을 통해 인간이 겪는 지독한 상처와 고독, 슬픔을 토로한다.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나오는 강간, 이별, 성적 사랑, 학대와 같은 소재는 무채색으로 점철된 무대와 아주 잘 어울린다. 관객들이 과제를 부여받듯 배우들에게도 과제가 주어졌다. 기존의 연극과 다른 실험적 무대와 같지만 사실은 훨씬 원초적으로 극 자체에 집중하게 하는 무대에서 배우들은 대사와 그 사이의 호흡과 표정이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가장 극대화하여 관객에게 캐릭터에 내재된 불안과 슬픔을 보여주어야 한다.

#1
A는 말한다. “내 마음 내 심장 영원히 끝나지 않을 사랑을 너와 함께 하고 싶다고!”
C는 말한다. “끝내. 끝내. 끝내. 끝내!”
#2
B는 말한다. “나 다른 여자랑 잘 거야. 섹스도 계속하면 사랑이 돼.”
A는 말한다. “너랑 다시 만나면 난 너한테 원하는 것만 빼앗고 떠날 거야.”
#3
A는 말한다. “우리 관계? 정말로 뻔하고 쓸 데도 없어.”
#4
M은 말한다.“고통은 그림자야”
그 뒤로 따르는 말들.“벗어날 수 있을까?” “절대 안 돼.”
이들의 말을 가만히 듣다보면 ‘사랑’은 어쩌면 가장 낭만적인 동시에 악마처럼 절대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지독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게 한다. 인간을 갈증하게 하고 욕망에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결국에는 슬픔과 절망으로 바닥까지 치닫게 만드는 ‘그 것’은 불행의 원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일상에서 사랑을 꿈꾸고, 나누고, 그러다 버리고 버려진다. 혹 누군가 말했던가.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만남과 이별의 과정을 거치면서 끝난다고. 는 사랑이 가지는 커다란 어둠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사랑이 주는 공허함을 특별하지 않게 들려준다. 이는 결국 일상 속 현대인의 삶 자체에서 가지는 고독을 말하기도 한다. 양정웅 연출은 그녀의 삶에서 느낀 ‘사랑’과 그에 대한 갈망, 그리고 절망을 고스란히 무대 위에 옮겼다. 배우들은 매 순간 순간 끝을 외치며 종용한다.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사라 케인처럼 그 것이 진정한 고통의 해방구임을 극의 캐릭터들도 주장한다.

#1
A는 말한다. “죽음은 내 애인이야. 내 안에 들어오려 해.”
#2
C“내가 날 멈출 수가 없어.”
A“날”
M“보내줘.”
#3
B"날 죽여줘.“
“행복해”
“행복해”
“난 자유야.”
하지만 극이 말하고자 하는 이러한 사랑의 우울한 면만은 아니다. ‘사랑’을 통해 무수히 상처를 얻으면서도 실상 인간은 다시 사랑을 꿈꾼다. “진짜 삶, 진짜 사랑” “너와 함께하고 싶어” 극에서도 역시 그러한 자기모순에 빠진 현대인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사람들은 사실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을 꿈꾸지만 그 ‘사랑’이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금방이라도 깨어질 유리잔처럼 얼마나 불안하게 존재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사랑하기에 갈망하고, 갈망하기에 절망하고, 절망하기에 더욱 사랑받고 함께하길 원하며 불안과 갈망의 노예가 되는 인간이란 존재를 내면 깊숙한 부분까지 파고들면서 이 극은 훨씬 섬세하고 날카롭게 보여준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연극에서 모든 것을 말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본인은 공연 내내 숨을 죽인 관객들 속에서 울음을 삼키지도 토해내지도 못한 채 끅끅거리는 몇 관객을 보았다. 다소 불편할 정도로 노골적인 대사의 향연들에 실험성 높은 연극에 익숙지 않은 관객들은 당황할 수도 있을 법 하나, 양정웅 연출의 전달력이 높았던 건지 배우들의 연기력이 높았는지 가늠할 수는 없더라도 그들의 힘과 메세지가 관객들에게 분명히 전달 가능함을 엿볼 수 있는 무대였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연극 <나의 검은 날개>는 와 전형적 연극의 형태는 아니라는 점에서는 유사하나 훨씬 다른 지점에서 밀도를 높였다. 가 배우가 읊는 대사로 드러나는 언어 자체에 집중을 했다면, <나의 검은 날개>는 신체의 움직임을 통한 이미지 구축에 집중 했다. <나의 검은 날개>는 신체극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만큼 대사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장면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각자 나름의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물론 그 전체를 엮으며 통과하는 하나의 흐름은 존재한다. 그 것은 ‘불안’이다. 알랭 드 보통의 저서 [불안]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형태의 내용을 모티브로 하여 다양한 상황과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는데, 그 내용은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이다. 그 것들은 현실과 멀지 않다.

‘돌잡이’에서 아이에게 원하는 것을 집으라고 하면서도 결국엔 자신들이 바라던 것을 집도록 종용하는 부모의 모습이, 그리고 ‘자기계발’에서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책에서 찾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어떠한 기준이 되는 바를 다른 사람들을 밀쳐가며 숱하게 뛰어넘으며 결국 승리를 쟁취하는 누군가의 모습이 극을 보는 바로 우리들과 닮아 있다. 관객들은 극의 내용이 드러내는 감정을 공감함으로서 단순히 극의 주인공은 무대 위 배우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들은 극에서 잔인한 우리들의 현실을 본다. 결국 모든 이들을 등 뒤로 떠밀며 얻어낸 자리에서 더 오르지 못하고 거부를 뜻하는 부저 소리 아래 주저앉을 수 밖에 없는 여자의 모습은, 뜻밖의 임신에 당장의 기쁨을 즐기기보다 일상의 넉넉함을 계산하고 낙태를 고민해야 하는 남녀 커플의 모습은 그리 특별하지만은 않은 우리 모두의 일상이다.


극 중 후반부에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대표하는 대사이자 유명한 구절이 인용된다.
“이제 어디로 가?”
“멀리 갈 수 없지.”
“내일 다시 와야지.”
“왜. 왜!”
“고도를 기다리러.”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을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의 삶에서 과연 ‘불안’과 ‘욕망’은 제거할 수 있는 것일까. 기약 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우리와 같다. 불안의 연속에서 한없이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쩌면 멍청하기도 하고 당연하기도 할 것이다. ‘고도’는 우리에게 지극한 ‘평안’일 수도 있고, 좀 더 세속적인 ‘성공’이 될 수도 있다. 그 무엇이든 우리는 그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결국 버리지 못한다. 그 것이 인간이고, 일종의 숙명이리라.

연극 <나의 검은 날개>는 단순히 보여주고 관객들을 공감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훨씬 더 원초적이면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움직임의 표현을 통해 그려진 현실 그림은 바로 우리들이 그 ‘불안’에 직면하게끔 한다. 요즘 힐링이라는 단어가 그야말로 대세이다. 어느 TV 토크쇼 프로그램의 제목처럼 힐링이란 단순히 소모적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웃고 즐기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직접 내 자신이 겪고 있는 그 ‘무엇’이 뭔지 파악하고 생각하며 해법을 찾음으로서 비로소 얻는 것이다. 색다른 형식의 콜라주 장치를 이용하여 각 장면마다 나름의 상징이 담긴 이미지를 구축한 조최효정 연출의 섬세한 그림 그리기는 훨씬 완성도가 높아 보였으며, 관객들이 ‘힐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자리를 자유롭게 마련하였다. 최소의 대사와 움직임만으로 관객들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무대 위에서 한없이 최선을 다하며 스스로 그 그림의 일부가 되었던 배우들에 따뜻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번 극단 여행자 프로젝트 는 극단 여행자가 인간에 대해 얼마나 섬세하고 날카롭게 바라보는지 알리는 동시에, 그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얼마나 전달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실험하는 보다 신선하고 나름의 파격적인 무대였다.
대학로티켓닷컴 기자단 김누리
kimnuri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