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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부엉이는 어떻게 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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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관리자
2012-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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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극단 인천 임선빈 작/연출 <부엉이는 어떻게 우는가?>
성유경(이화여대 국문과 박사과정)
희한하게도 <부엉이는 어떻게 우는가?>는 알레고리로 읽힌다.
깊은 밤, 도시에서 살다가 산골마을로 귀촌한 젊은 부부(부인 이희영 분/ 남편 정성호 분)가 싸움을 한다. 말싸움을 넘어 육탄전도 벌인다. 그러다 싸움 중 뜬금없이 4대강 사업에 대한 비난이 부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사소하고 평범하고 코믹할 수도 있는 부부싸움의 풍경에 이 말은 한밤중 자동차 경적음처럼 관객의 귀를 놀라게 한다. 부부싸움은 서로를 신경 쓰게 만드는 소음으로 시작해서 부엉이 우는 소리를 인지하는 청각 차이 때문에 심화되고, 부인의 무식이나 남편의 무능을 헐뜯다가 이웃 일에 참견한 부인에게 남편이 화를 내는 것으로 정점을 찍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갑자기 등장하는 4대강 사업에 대한 대사는 매우 낯설다. 유치하면서도 웃음을 유발하는 부부싸움의 구경꾼이 된 관객은 이때부터 <부엉이는 어떻게 우는가?>가 만만치 않은 질문을 던지는 지적인 연극임을 알게 된다.
단 한 줄, 혹은 한 문단이 작가의 의식을 대변하는 경우가 있다. 깨닫고 보니 이 세상 모두 은유였다고 논하는 <삶으로서의 은유>에서 지미 카터의 전쟁 은유를 한 문단에 담아낸 레이코프와 존슨은 미국, 혹은 미국인의 사고를 꼬집으려 한 정치적 입장을 내비친다. 작가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실오라기 한 줄에서도 묻어난다. 그런 이유로 평자는 <부엉이는 어떻게 우는가?>를 본성적으로 공동체적 존재이자 사회적 존재인 인간을 둘러싼 법과 윤리의 드라마로 정의하고자 한다.
인간은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맺으면서 사는 연대적인 존재다. 나와 타인은 연결되어 있기에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면서 정서적인 연대성과 소통의 연대성을 강화하고, 전 생애에 걸쳐 대화를 나눈다. 우리는 네트워크 속에서 산다. 인식을 공유하고 고통을 공감하면서 우리가 지향하는 이념과 가치에 관한 발언을 하는 SNS 세상은 공동체의 가치관과 속성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성을 생태학적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인간은 동물이나 식물 등 만물과 얽혀있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만약 인간이 이익과 효용이라는 관점에서 자연을 점유하고 이용하고 정복한다면, 그것이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면 분명 그러한 행위를 막기 위해 법을 위반하려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국가라는 존재 세계의 질서인 법은 우리에게 선(善)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강제력과 집행력이라는 힘으로 압박해온다. 이때 윤리와 법은 충돌한다. 윤리학자인 피터 싱어는 그의 저서 <실천 윤리학>을 통해 자연을 파괴시키거나 생태계의 생명을 착취하는 현상에 반발하고 법에 복종하지 않는 내면의 양심을 헨리 소로우의 ‘시민불복종’ 발언으로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법률이 지시하는 대로가 아닌 우리의 양심이 일러주는 대로,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키우는 것으로 행동해야 한다. 물론 합법적이라면 옳았을 행위와 불법적 행위임에도 옳았을 행위를 같다고 보는 것도 아니고, 법에 윤리적인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도 아니지만, 예를 들어 4대강의 경우 시민불복종은 그 사업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가치들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적합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부엉이는 어떻게 우는가?>에 나오는 4대강 대사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말하는 하나의 예로 작용한다. 그것이 아닌 다른 예를 들어도 충분하지만, 아마 임선빈은 동시대적 리얼리티를 강조하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들기 위해, 다시 말해 이 연극이 의미하는 바가 극장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극장 밖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시사성까지 제시하기 위해 모두에게 익숙한 사항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 싶다.
<부엉이는 어떻게 우는가?>가 공연되는 무대 위에는 부부가 거주하는 전원주택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그 모양이 매우 흥미롭다. 파란색 목재 골조로 틀만 짜이고, 내부는 뻥 뚫렸다. 목재 프레임의 육면(천장과 바닥 포함)에는 흰 줄이 거미줄처럼 칭칭 복잡하게 감겨 있는데, 포획줄 같기도 하고 그물 같기도 한 형상으로 건물을 뒤덮고 있다는 설명이 적합할 것이다. 이 줄은 남편이 인터넷을 하면서 바둑을 두는 바둑판에도, 부부가 이웃과 통화하거나 경찰의 연락을 받는 전화기에도 연결되어 있다. 상당한 길이가 사용되었을 흰 줄은 건물뿐만 아니라 통신수단에도 감겨져 있는 셈이다. 노트북, 바둑판, 전화기가 이 연극에서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기에 이러한 설정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주인공인 부부는 복잡한 서울살이에서 산골마을로 귀촌을 했고, 귀농생활을 한다. 귀농이라는 어감 때문에 이들의 삶에 어떤 낭만적인 아우라를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물론 마을에는 돈 많은 예술가의 저택도 자리하고 있고, 고급 외제차가 활보하기도 하지만 부부는 심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자 이곳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들은 일단 적응기간을 갖고 아예 눌러 살지 서울로 올라갈지 고민하는 단계에 있다. 귀촌을 결심한 건 남편 쪽의 의사가 컸다. 30대 후반의 바둑칼럼니스트인 남편은 사법고시에 실패한 인물로 법을 공부한 사람답게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부인은 그가 세상에 정면으로 맞설 용기가 없어 바둑판 뒤로 숨어버린 것이라고 질타한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과 세상 사이의 갈등을 뒤로 하고 아예 단절의 길로 들어선 자다. 자연 속에 침잠하길 원했듯, 바둑이라는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누군가와 공감하는 능력이 점점 둔해지고, 어쩌면 감각을 망각하는 것이 고통에서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송사에 휘말린 이웃에게 법률상담을 해주기도 하지만, 인터넷 지식을 빌린 형식적인 대답만 들려줄 뿐이다. 그가 인터넷을 활용하는 경우는 바둑 영상과 지식 검색, 단 두 가지. 소통과 담쌓으려는 사람이다.
반면 부인은 자신의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남의 글에 그림을 그리는) 삽화가로 등장한다. 이웃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이웃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면서 남다른 정의감을 보여주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사가 아닌 남의 말에 휘둘리고 그것을 그대로 전파하는 자다. 어떤 지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말이 남의 삶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판단하지 못한다. 가을걷이가 끝난 후 초겨울로 접어든 산골마을에서 일이 없어져 매우 무료함을 느끼는 그녀에게 초미의 관심사는 타인의 생활. 남의 사생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만 들려도 창에 매달려 차주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남편에게 얘기한다. 그런 그녀와 남편은 충돌한다. 이성적이지만 소통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사는 남편 대 비이성적이지만 소통이 원활하고 정의롭지 못한 일에 분노할 줄 아는 아내. 이 둘은 매우 다르다. 부엉이 우는 소리도 다르게 듣는 인물이다. 그러면서 이들의 충돌이 극으로 치닫는 장면은 이웃의 가정에 부인이 찬물을 끼얹으면서 일어나는데, 이때부터 <부엉이는 어떻게 우는가?>는 많은 시사점을 관객에게 던진다.
부인은 이웃이자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막역한 사이라 칭하는 미자에게 남편 종길의 과거를 고해 가정불화를 일으킨다. 종길에게 예전 여자가 있었으며, 둘은 여자가 임신한 상태에서 헤어졌는데,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 종길의 과거를 덮은 것이라고 분노하면서 정의감을 불사른다. 사건의 전말은 모두 박씨 할머니라는 이웃에게 들은 것이다. 종길과 종길의 모친은 입을 놀린 두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고소까지 취하려든다. 남의 일에 신경 끄라고 누누이 강조하는 남편과 자신은 정의로운 일을 했다고 의기양양한 부인이 충돌하는 것은 당연지사. 둘은 말싸움을 넘어 육탄전으로 치닫고, 이때 박씨 할머니가 부부의 집에 방문한다. 박씨 할머니는 이미 농사일로 송사에 휘말린 처지다. 할머니와 부인은 우리가 무얼 잘못했냐고 의견 일치를 보고,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을 맹비난한다. 이런 상황이 불편한 남편은 할머니가 빨리 가주기를 바라고, 긴 넋두리를 마친 할머니는 마침내 자리를 뜬다. 할머니 역으로 분한 강애심 배우는 무대 뒤편으로 퇴장하는 것이 아닌, 극장의 문을 열고 사라진다. 중요한 설정이다. 이제는 조용해지나 싶던 무대에 다시 파장이 인다. 경찰이 전화로 할머니가 귀가 중 사망했다는 정보를 전하기 때문이다. 부인은 종길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내뱉고, 남편은 경찰조사를 받으러 집을 나선다. 아마 법이 해결해 줄 거라 생각하면서.
이제부터 작가이자 연출가인 임선빈의 의도를 파악해보자. 분명 인간은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맺으면서 사는 연대적인 존재다. 나와 타인은 이웃이자 친구다. 이 연극에서 이웃이자 친구라 불리는 인물들은 무대 위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 역시 일촌, 이웃, 트친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통신수단으로 만나지 않는가. 우리는 그들을 모를 수 있지만, 그들과 정서적인 연대를 맺으며 그들의 고통에 합류한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불의에 댓글에 달고, 리트윗을 하며 공동체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이를 널리 전파한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과 연대의식이 모두 성숙하다고 말할 순 없다. 목조 프레임을 칭칭 휘감고 있는 흰 줄은 포획줄이나 그물에 갇힌 성장의 한계나, 인식의 경계를 넘지 못하는 미성숙을 비유한다. 연극의 등장인물인 부인처럼 자신의 성숙한 사고가 아닌 남의 말에 휘둘리는 사태는 얼마든지 발생한다. 게다가 임선빈은 부인이 미자에게 불의를 고하는 과정에 있어 무료함을 달래는 흥미나 관음증, 혹은 악의적인 의도가 개입되었을 수도 있었음을 추측하게 만든다. 남편처럼 내 일만 신경 쓰자면서 폐쇄성과 단절감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남의 고통에 둔감한 것과 세상사의 씨름에서 등을 진 것은 같은 맥락이다. 세상은 그의 주변에서 관계의 거미줄을 치며 들러붙는다. 도시에서 빠져나와 산골에 숨어든 그는 자충수를 둔 셈이다. 그는 법을 어긴 적이 없다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현실 개선은 무정과 무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세상이라는 알레고리를 관계의 줄로 표현한 무대장치는 이 연극에서 빛을 발한다.
정리하자면, 불의에 분노하고 세상사에 동참하는 공동의 노력은 유의미하다. 하지만 윤리란 지적인 과정을 거쳐야 하며, 삶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윤리는 사회전반의 의식수준을 반영하고, 미래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말한다. 미래란 자율적인 노력에 의해서만 주어지며, 윤리는 미래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말한다. 가을걷이가 끝난 후 일이 없어진 부부의 상황은 이를 곱씹게 한다. 인간은 시간이 지난다고 모두 인간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가을이 온다고 결실이 맺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주체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그만큼 힘든 과정을 거친다. 꽃피는 좋은 시절은 쉽게 오지 않는다. ‘시민불복종’이 의미를 얻으려면 위에 열거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윤리적인 것은 자발적인 것이다. 법은 윤리의 최소한이 되어야 하며,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에서만 힘을 써야 한다. 박씨 할머니의 본명은 박판례다. 판례란 재판의 전례를 일컫는다. 한 인간의 죽음은 실존적인 차원이 아닌 법의 차원에서 다뤄진다. 할머니가 음주를 했는가, 음주가 사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목격자는 존재하는가, 종길은 알리바이가 있는가, 혹 유서는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유서의 진위는 어떻게 가려져야 하는가. 만약 종길이 할머니 사망과 연관이 있다면 고의적인 것인가 아닌가. 이 연극의 뒷이야기를 쓴다면 할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숱한 소문이 퍼지면서, 왜곡의 드라마가 전개되거나 아니면 어떤 논조로 부조리한 것들을 덮을 것이다.
<부엉이는 어떻게 우는가?>는 군더더기가 간간히 있지만 큰 흠이 되지 않는, 작가의 서사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배짱 있는 연출도 흥미롭다. <부엉이는 어떻게 우는가?>만 봐서는 임선빈은 사회정치적 발언이 강한 연극인으로 보인다. 극장에 “누구의 말에 동의하십니까?”라는 종이를 붙여 관객의 반응을 구한 점도 그녀의 성향을 알게 해준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연극의 엔딩장면인 (죽은) 박씨 할머니가 쭈그리고 앉아 부엉부엉 울고, 곧이어 암전이 되는 상황으로 연출한 것에 관해 짐작되는 면이 있긴 하지만, 때로는 힘을 빼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