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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모래의 여자
  • 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 2015-11-27 조회수 1456

‘젊은 예술가’를 위하여

: <모래의 여자>(구자혜 각색․연출)  


 백두산


 

“네 맛도 내 맛도 없는, 하지만 꽤 글솜씨가 있는 젊은이들의 문예 시평을 읽으면서, 도대체 이것은 무슨 생각으로 쓴 글일까를 생각해 본다. 말하자면, 마른 나무라도 산에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쓰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비평은 시시한 작업이니까, 그 정도의 뻔뻔스러운 생각은 요즘 보통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 꿰뚫어보는 건 좋지 않겠지, 사실은 그냥 즐거워서 쓰는 것이겠지, 단지 순수한 것뿐이겠지. 그것이 순수함이라면, 순수함이란 얼마나 비열한 것일까?” (고바야시 히데오, 「비평에 대하여」)

‘아르코에서 주목하는 젊은 예술가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공연된 <모래의 여자>(구자혜 각색․연출,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2014.2.18-23)와 <젊은 후시딘>(윤미현 작, 윤한솔 연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2014.2.21-3.2)은 각각 작가 겸 연출가 구자혜와 작가 윤미현을 ‘젊은 예술가’로 세운다. ‘젊은 예술가’란 무엇인가? 일본의 문예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가 쓴 위의 인용문은 ‘젊은 비평가’를 겨냥한 비평의 부분이다. 몇 가지의 단어를 고쳐 본다면 그것은 ‘젊은 예술가’에 대한 비판적 견해로 읽혀지기도 한다. ‘젊은 예술가’라는 이름은 사실 어색하다. 예술 앞에는 젊다는 수식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 앞에 붙는 젊음이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 온 햇수만을 다른 사람과 견주어 일컫는 담백한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교활한 수식어는 ‘실험적이다, 패기있다, 재기발랄하다, 순수하다, 촉망받는’ 등의 말과 친구이다. 한편으로 젊음의 의미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지적과 같이 ‘볼품없이 자리를 채우는 마른 나무, 무대를 하찮게 여기는 뻔뻔스러운 생각, 분수도 모르는 순수함’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연극예술이 진정으로 ‘비열한 것은’ 그것이 오해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젊은 예술가’라는 이름은 이제 작품 활동을 시작하는 예술가들에게는 유용한 것임이 틀림없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여, 예술가에게 ‘젊다’는 수식이 주는 최고의 매력은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완성되지 않았으니, 다음 작품을…….’ 또는, ‘더 좋은 작품을 기대한다.’ 평가는 문장 안에서 유예된다. 전혀 예술적이지도, 비평적이지도 않은 이 말은 ‘젊다’는 모순적인 상황에서만 통한다. 더 비열한 것은 예술가들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는 말이 작품에 대한 객관적 비평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젊은 예술가들은 다음 기회를 받을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우리의 열악한 연극 환경에서 다시 젊은 예술가들이 또 ‘좋은 환경’ 아래 공연을 올리는 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제작과 비평의 과정에서 날아오는 날 선 말을 견디거나 다시 되쏘는 예술가의 말은 젊음의 의장(擬裝)을 입는다. ‘비열하게도’ 이러한 몇 번의 왕복을 거친 다음에야 강철은 완성된다.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패기와 시도에 보내는 메마른 박수와 뻔뻔스러운 생각을 깨뜨리겠다는 날 선 말, 둘의 어느 사이에 있는 것 같다. 젊음의 의장을 입은 예술가들의 시도나 의도를 되도록 충실히 읽어내는 것, 그러한 방법으로 빛나는 찰나를 읽어내는 것, 한편으로 그 안에서 ‘젊음’이라는 의장을 걷어 보는 것이 그 과정에서 필요할 듯하다.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의 원작소설 <모래의 여자>(1962)는 외딴 사구로 곤충 채집을 나선 한 남자가 마을 노인의 부추김으로 모래구덩이 안에 놓인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면서 시작한다. 남자는 흘러내리는 모래를 퍼 나르는 여자를 만나고, 곧 그 구덩이에 갇히게 된다. 소설 <모래의 여자>는 결국 남자가 자발적으로 탈출의 기회를 포기하게 되는 경위를 설명한다. 그는 왜 탈출을 포기했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 소설 <모래의 여자>는 남자의 시야에 초점이 있다. 그 시야에는 구덩이 안의 여자와, 모래와, 바깥의 망루와 마을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두껍게 놓여 있다.

연극 <모래의 여자>는 바깥을 잘라내고 모래구덩이 안의 남녀에 초점을 맞춘다. 삼각형의 무대공간과 그 위에 걸린 우산 오브제는 남자와 여자가 갇힌 모래구덩이와 집을 지시한다. 무대에 끝까지 남아있는 남자의 배낭과 화구 상자는 여기가 떠날 수 없는 곳이기에 아이러니하다. 무대 공간과 오브제는 모래 구덩이, 사구, 우산, 배낭 등 원작에 지시된 표현을 기능적으로 수행하였다. 소설과는 달리 바깥이 잘려나간 상태에서, 연극은 남자의 세계가 여자의 세계로 허물어지는 맥락을 ‘이 마을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유수장치와 같은 성취에 대한 미련보다 여자와 남자의 관계로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연극 <모래의 여자>에서 모래와 여인의 관계는 소설의 두꺼운 묘사를 ‘그대로 읽는’ 배우의 대사로 표현된다.

“여자의 몸에서 모래가 흘러내려, 어깨와 팔과 옆구리와 허리의 일부가 드러났다. 하지만 그런 데다 정신을 팔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다가서면서 얼굴에 덮은 수건을 걷어냈다. 얼굴은 온통 얼룩투성이었지만 모래에 덮여 있는 몸에 비하면 으스스할 정도로 생생했다.”

넝마를 입고 드러누운 여자의 육체를 바라보며 남자는 이 대사를 ‘독백한다.’ 연극 <모래의 여자>는 이같은 두터운 묘사들을 ‘읽어준다.’ 이와 함께 곳곳에서 원작에 “귓속까지 윙윙거리는” 것으로 표현되는 모래의 움직임과 남자의 중압감은 감각적인 음향으로 전달된다. 원작의 두꺼운 묘사를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하다 보니 자연스레 연극 전반부의 리듬은 사건의 진행보다 묘사의 흐름을 따라간다. 텍스트가 무대에서 말과 소리로 전달되는 것은 어색하지 않다. 어색하다면 너무 일반적이라 어색한 것이 아닐까. 연극에서는 그 일반적인 기호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변신하는 기호들의 놀이를 기대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면 무슨 맛인가. 극의 앞부분은 한없이 느리게 흘러갔다. 특히 연극의 전반부, 이 구덩이에 갇힌 남자의 분노와 탈출, 협박, 절망의 단계를 배우 백석광의 연기는 과장되게 보여주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남자가 모래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늪에 빠져 다시 잡혀오게 되는 첫 번째 탈출 장면이었다. 탈출한 남자는 삼각형의 무대를 벗어나 그 주변을 배회한다. 무대 뒤 배경에 흐릿하게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사구의 굴곡이 비친다. 여자에 대한 생각을, 들개를, 모래를, 사구를 거쳐 남자는 필사적 탈출을 감행한다. 무대에서 남자가 만나는 구덩이 밖의 세계는 여자 역할을 맡은 윤현길의 몸으로 표현된다. 윤현길은 들개가 되고, 여자의 목소리가 되고, 남자의 다리에 붙은 모래가 되고, 걸음을 둔하게 만드는 집착이 된다. 이 장면의 후반부에서 윤현길의 몸은 마치 백석광의 그림자이자 미련마냥 움직인다. 그 모든 것은 여자다. 남자의 몸이 빠져드는 장면은 “귓속까지 윙윙거리는” 음향으로 채운다. 연극 <모래의 여자>에서 가장 감각적인 장면이다. 두터운 묘사를 밋밋하게 따라갔던 많은 장면들과는 달리, 이 장면에서 배우의 몸과 음성, 시각적 기호는 조화롭게 공존한다. 그러나 이후로는 이같은 빛나는 장면을 찾기 힘들다.

원작 <모래의 여자>가 지니고 있던 두터운 묘사에 대한 무대화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라 보기 힘들었다. 원작의 언어를 다양한 기호로 보여주려는 시도와 연극적 재미, 관객이 집중할 만한 긴장의 리듬이 공존하지 못한 것이 젊은 예술가의 연극 <모래의 여자>를 본 아쉬움이었다. 그러한 공연의 흐름 속에서 원작이 담고 있는 자유에 대한 사유, 남자는 왜 탈출을 포기했는가, 갇혀있는 삶은 무엇이고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메시지 역시 어떤 맛으로 해석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못했다.